이 사랑이 그렇게 나쁩니까? 김옥경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결심을 한다. 그 중에 헤어질 결심은 타인은 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심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헤어질 결심을 하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헤어질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 상대와 헤어질지 말지는 내가 마음먹는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의 결심을 모른다. 헤어지고 싶어 결심하는지, 헤어지지 못해 결심하는지. 여기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을 하는 두 남녀가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사망사건의 용의자와 담당 형사가 사랑에 빠지는 어쩌면 뻔한 스토리이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이 진부한 이야기를 영화 속의 벽지, 작은 소품 하나에도 메타포를 숨겨놓는 박찬욱 스타일로 풀어냈다는 게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이다. 영화 초반 정훈희의 목소리로 “안개”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부터 보이는 게 다는 아니겠구나 싶었는데 영화는 끝까지 걷히지 않은 안개로 매캐한 잔기침을 하게 했다.
등산을 갔던 남편이 산에서 추락사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의 부인 서래는 용의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담당형사 해준과 서래는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서래는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으로 조사 과정에서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한국어 단어들을 말하며 해준을 혼란스럽고 궁금스럽게 한다.
용의자의 행적을 살피려 시작한 해준의 잠복 수사는 그녀에게 더 다가서게 하고 다가선 마음은 그녀를 사랑하게 한다. 해준은 형사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특히 살인 사건을 끈질기고 반듯하게 해결함으로써 형사의 품위를 지켜왔다. 하지만 이 용의자는 그런 해준의 직업적 가치관 뿐 아니라 유부남인 도덕적 양심마저 흔들고 있다. 상식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둘의 관계가 불편할 법도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전개되는 이 둘의 잘못된 사랑에 가슴 조리게 되고 응원까지는 아니라도 헤어질 결심은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결국 해준은 서래가 남편을 죽인 범인임을 알게 되지만 자살로 종결시키며 사건을 해결한다. 해결된 사건은 더 이상 관심두지 않는 것이 해준의 방식으로 서래와의 관계도 해결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의지는 형사와 용의자인 둘의 관계를 잊게 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해준은 미결 될 뻔한 사건을 해결하며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 되었어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고백을 하는 이 장면은 안개 속에 가려진 듯 뿌연 장면들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어 해준은 서래가 범인으로 밝혀지는데 중요한 증거가 되는 휴대폰을 바다 깊숙한 곳에 아무도 모르게 버리라고 한다. 그렇게 해준은 서래를 잊으려 하지만 잊지 못하는 마음을 들키게 되고 서래는 그의 말을 절절한 고백으로 들으며 이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살면서 했던 수많은 헤어짐 중에 결심이 필요 했던 헤어짐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짐짓 잊지 못해, 못내 끝내지 못해 목적없이 부유하던 그때의 내 마음들도 해준의 결심과 닮아있다는 걸 이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사건을 종결시키고 주말부부로 지내던 해준은 와이프가 있는 이포로 내려온다. 13개월 후 그곳에서 우연히 서래와 마주치게 되고, 또 한 번 남편을 살해 한 용의자로 취조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부산에서 이포로 근무지를 옮긴 해준은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공교롭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미결 사건의 사진들을 집 한쪽 벽에 붙여 놓고 잠 못 이루는 해준을 재워주었던 여자.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떼우는 서래에게 밥을 해주었던 남자. 꺼낼 수 없어 영원히 묻어 두고 있던 감정 속에 또 한 번의 미망인이 되어 두 번째 용의자로 해준 앞에 나타난 서래. 해준은 이 여자가 너무 의뭉스럽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하나. 결심 뒤에도 보내지 못하는 그 사람을 이포의 안개와 함께 묻는 해준의 마음. 또, 그 사랑이 애잔하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 했을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서래가 한국어로 표현되지 않는 결정적인 말들을 중국어로 하고, 휴대폰의 번역기를 이용해 해준에게 들려주는 장면들이 흥미로웠다. 앞서 몇 번의 번역된 말들은 남성의 목소리로 나왔지만 이 대사가 번역 될 때는 여자의 음성이 나와 서래의 마음에 더 이입되었다. 서래가 직접 고백하는 것 보다 번역기로 들려주며 그 음성을 둘이 함께 듣는 모습에서 더 깊은 고백이 느껴졌다.
이 영화의 절정은 엔딩과 함께 온다. 서래는 갯벌에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밀물을 기다리며 파도가 밀어온 모래더미 속으로 사라진다. 나에겐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었고 가히 박찬욱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엔 더 깊은 바다에 버려요.” 서래는 두 남편의 살인사건 때마다 결정적인 증거였던 휴대폰 대신 자신을 바다에 던짐으로써 그 속에 그들의 사랑도 함께 봉인한다. 마침내 스스로 미결사건이 되어 해준에게 영원한 사랑으로 남게 된 서래. 영화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보고 읊조리던 서래의 대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참 불쌍한 여자네.
산에서 만나 바다에서 헤어진 서래와 해준. 어쩐지 산등성이에 하얗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섬을 향해 부딪치는 하얀 파도와 닮았다. 그 속에서 하얗게 피어나는 서래와 끊임없이 부딪치는 해준의 모습이 보인다.
살면서 했던 몇 번의 사랑은 늘 자욱한 안개 속에 감춰진 모호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지켜야 하는 사랑과 놓아야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때로는 쉽게 때로는 어렵게 헤어질 결심을 하곤 했다. 아직도 사랑은 어렵고 미숙하지만 해준과 서래가 했던 것처럼 그 사람을 살피고 바라보고 걱정하는 마음을 행동함으로써 그 안개 속으로 둘만 걸어 들어가는 게 사랑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둘만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극진한 것. 그래서 이 둘의 사랑을 나쁘다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대사에 고백을 담은 이 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아리고, 고혹적이며, 격렬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거야”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랑을 한다. 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자로 맞춘 듯 딱 떨어지지 않는 건 사랑도 삶도 그렇다. 오늘도 나는 실종 신고도 하지 못한 미결의 감정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옆에 붙들어 놓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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