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결로 완성된 영원한 사랑
박세리
박찬욱 감독 영화는 불친절하다. 그는 극중 인물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나눌 수 없는 다층적 인물로 그린다. 대표작 <박쥐>,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인물들이 그랬고,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도 마찬가지다. 극중 인물의 악한 행동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고, 그것이 인물이 풍기는 ‘매혹’과 만나면 어이없게도 ‘당위’를 얻는다. 그래서 박 감독 영화는 악인마저 동정하게 만든다.
이렇게 관객이 설득당할 때 도덕관을 흔드는 치킨게임은 시작된다. ‘너는 다를 것 같아?’, ‘너라면 어떡할래?’, ‘선택해 봐’ 따위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정당성’에 대한 가치 판단을 다시 한다. 그리고 결국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타인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진실에 이른다. 누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서래와 해준은 용의자와 형사로 만난다.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를 탐색한다. 서래는 다정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형사가 궁금하고, 그건 해준도 마찬가지다. 죽은 남편 사진을 직접 보길 원하는 서래는 시종일관 물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태도를 유지한다. 충분히 수상한 상황이지만, 용의선상에 오른 그녀에게 해준은 뭔가 다른 걸 감지한다. 해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래의 집 앞에서 잠복하다 급기야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망원경까지 동원해 그녀를 훔쳐본다. 잠복근무라는 미명 아래 해준이 한 건 감시일까 보호일까 관음일까. 그 경계선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미혹되고 만다. 그의 눈에서 서래를 향한 강렬한 욕정이 읽힌다.
그 후 해준은 사건 조사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서로 연결되길 열망한다. 산보다 바다를 더 좋아하고 끔찍한 범죄 현장 사진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공통점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다. 해준은 서래를 그렇게 ‘같은 부류’로 정의한다.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 알았어요.
남편 사진 보겠다고 했을 때,
‘말씀’은 싫다고,
나도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해요. (…)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건
피 많은 현장…… 냄새 때문에”
사건은 서래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며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유능한 형사 해준은 끝내 그녀가 남편을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정황을 파악한다. 절망한 해준은 살인을 증명할 결정적 증거가 담긴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고 부산을 떠난다.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 완전히 붕괴됐어요.”
무너진 해준. 이별을 통보받은 서래. 수개월 후 둘은 해준이 전근 간 이포에서 다시 용의자와 형사로 재회한다. 그것도 재혼한 남편 사망 사건으로 말이다. 해준은 서래를 의심하고 심문하다 왜 그런 남자하고 또 결혼했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때 서래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영화 제목이 등장한다.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힘주어 말하는 서래의 눈빛은 단단하다. 이 기이하고 고어적인 서사는 서래의 대사 하나하나를 통해 ‘비틀린 사랑’이란 표피를 쓴다.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이 말은 극 중 서래가 즐겨 보는 한 드라마 대사다. 서래는 종종 사극이나 드라마 대사를 일상어로 사용한다. 이 부자연스러운 말들은 외국인인 서래를 거치며 순도가 높아진다. 서툴러서 더 농밀한 진심으로 다가오는 말에 해준의 마음은 안녕할까. 그녀의 행동도 순도가 높은 건 마찬가지다. 서래는 두 번째 남편 사망 사건 현장의 피를 모두 닦아낸다. 해준이 피 많은 사건 현장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서다. 그를 위한 배려가 사건 현장 훼손이라니, 서래의 스스럼없는 행동은 순수하기까지 하다. 주도면밀하게 살인을 기획하는 서래가 불쌍해지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서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느새 해준이 "슬픔에 대해 어떤 사람은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서서히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이 사랑의 완결은 해피엔딩이길 바랐다.
하지만 점점 좁혀오는 수사망, 서래가 의심받으면 해준의 삶도 위태롭다. 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구덩이 속에 자신을 밀어 넣어 그를 지킨다. 그렇게 미결 사건으로 남아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서래를 찾아 만조가 되어가는 해변을 절박하게 헤매던 해준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신발 끈을 동여매던 그의 모습이 오래도록 남았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사랑이란, 뭘까. 이 영화가 오래도록 많은 이들에게 회자 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랑이기 때문일 거다.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종국엔 자기 자신마저 죽이는 서래의 사랑법은 잔혹하고 비틀렸지만, 달리 보면 상대를 향한 벅찬 사랑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사랑의 실상'은 아닐까.
잔혹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서래, 끝내 사랑을 놓쳐버린 남자 해준, 영영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사건, 온통 미결투성이라서 더 매혹적인 영화 <헤어질 결심>. 미결로 완성된 사랑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 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영화와 헤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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