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지킨다는 건
김옥경
이번 주에 마감 할 글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마감일이 지났고 하나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마감일이 지나도록 글을 완결하지 못했다는 압박감은 공과금 납기일을 넘겼을 때보다 훨씬 크다. 그저 무기력한 나만 덩그러니 남아 두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에 안달복달이라는 가시가 꽂히고 가시에 찔린 시간들은 방울방울 흩어져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에게 글쓰기란 흐려지는 눈을 부릅뜨고 노트북의 전원을 켜게 만드는 것. 옷소매를 당겨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판 위에 손을 올리게 만드는 무언의 힘이다.
무언가를 쓰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발견했다거나 고민을 해결했다는 말, 더 나아가 삶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하는 의례적인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네네. 알겠습니다.’ 라며 귓등으로 흘려보내거나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곁을 주지 않았다.
10여 년 전 아이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수업을 시작하며, 수업에 도움이 되고자 배운 독서치유와 심리학을 통해 많은 책을 읽었다.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기쁨에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책을 찾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앎의 기쁨은 분노로 바뀌기 일쑤였다. 이상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사는 일이 더 힘들어 졌고,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갔다. '모르고 살면 좋았을 걸.' 하는 회한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날은 ‘내일 당장 세상이 무너지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어 깜깜한 밤을 등에 업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숨죽이고 있던 진짜 내가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 나의 글은 억울함과 분노의 토로로 시작되었다. 여러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만 아우성치던 말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나는 책에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성급하게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기분을 고려하지 못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단어들은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였을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렇게 말이 길을 잃을 때 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말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동네 조그만 북 카페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글 쓰는 모임에 나갔다. 주제도 형식도 없는 가벼운 모임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근황을 전하고 그 주에 각자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고 나누는 자리였다. 그런 모임이 처음이었기에 한 문장을 쓰면서도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했고 마침표를 찍어도 끝내 탐탁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을 낭독할 때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들킬까봐 두 손을 꼭 그러쥐곤 했다.
몇 주가 지나니 낯선 사람들과 함께 쓰는 글은 오히려 나를 솔직하게 만들었고, 잘 쓰지 못해도 그저 경청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또 다음 문장을 쓰게 했다. 그렇게 나의 글은 시작되었고 억울함과 분노의 토로는 계속되었지만 쓰다보면 내 마음이 그게 다는 아니었음을 깨닫는 날이 늘어 갔다.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타인을 향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동안 쓰던 말과는 다른 어감의 단어로 치환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꼭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단어들이 있구나.’
뾰족하게 깎은 연필심 같은 나의 말들을 빈 종이에 사각사각 선을 그어가며 뭉툭한 글로 만들어 나갔다. 내가 써내려간 단어들 사이에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숨죽여 울던 수많은 밤은 나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쓰는 글은 순한 말로 변해갔다. 이상했다. 쓰면 쓸수록 세상은 나에게 친절했고 쓰면 쓸수록 나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갔다. 쓰는 걸 모르고 살았으면 어쩔 뻔 했나 싶어 세상이 제발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래서 계속 쓰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나의 첫 책 <모든 순간의 안녕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글이다. 비록 서툰 글이라도 나의 뾰족한 말들이 뭉툭하고 온기있는 글이 되어 아프지 않게 세상에 닿을 수 있었다.
마감을 지켜 글을 쓰다 보면 지켜야 할 건 마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방울방울 흩어지는 나의 시간을 모으는 소중함. 똑같은 하루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찾아내는 감사함.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때로는 멈춰 서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는 따뜻함이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마감을 지켜 글을 쓸 때는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한편의 완결된 글을 쓴다는 게 중요하다. 마감을 지킨다는 건, 곧 나에게 주어진 삶을 지켜내는 것. 완벽한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 자리에 온전한 나 자신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마감을 지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치열하고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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