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기록자의 글쓰기
박세리
매년 초가을 무렵이면 다음 해에 쓸 다이어리를 장만한다. 2024년 다이어리도 이미 사두었다. 그다지 부지런한 편도 아니면서 다이어리만큼은 남들보다 두어 달 서둘러 챙긴다. 글쓰기에도 이런 바지런함을 발휘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특히 시간을 정해 꾸준하게 무언가 하는 건 일상이나 글쓰기에서도 모자란 편인데 군데군데 새하얗게 빈 다이어리가 이를 대변한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까지도 빈 곳이 있다. 일로써의 글쓰기를 제외하면 쓰는 시간 보다 읽는 시간이 더 많다. 한마디로 게으른 기록자랄까. 그럼에도 글쓰기가 일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마다 함께한 다이어리 덕분이다.
20년, 그러니까 스무 권 정도의 다이어리에 지난 삶이 기록으로 남았다.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당시 삶이 어땠는지, 관심사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업무를 맡았는지 알 수 있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좀처럼 쓸 시간을 마련할 수 없을 때부터는 일상에 대한 짧은 단상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쓰자, 쓰면서 정리하고, 쓰면서 버텨내고, 쓰면서 버리자. (2016)
가까운 사이일수록 용서의 과정이 생략되곤 한다. “미안해”란 말 한마디로 자신의 짐만 덜 뿐 상대의 마음까지 보듬는 일은 제 몫이 아니라고 여긴다. 실상은 말 밖에 존재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에 기대 ‘그래, 너는 오죽했겠니...’ 상대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한껏 끌어올려 상황을 정리한다. 설령, 그것이 나만의 오해일지라도. 어쩌면 삶은 좌절에 대한 인내력을 키우는 연습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2018)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뒤척임으로 썼다.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은유 작가가 자신의 책 <글쓰기의 최전선>에 쓴 구절이다.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러하므로. 기자적 글쓰기에는 삶의 구체성을 담기 어렵다. 서평기사라는 특성 아래에서도 주어진 자유의 폭은 좁고 제한된다. 그 지점에서 오는 답답함이 있다. 나도 나를 이해할 언어를, 나를 표현할 언어를 갖고 싶다. (2019)
어느 해는 일기로 채워져 있고, 어느 해는 업무 관련 메모만 가득하다.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 내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이의 일상과 나의 일상이 한데 엉켜 굴러가던 시기의 글은 기쁨과 통한 사이를 오가느라 총천연색이다. 업무량이 늘어나 아이를 늦게까지 보육시설에 맡겨야 했을 때는 또다시 업무 메모만 가득해 쪽글마저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짧게나마 끄적거린 기록은 일상다반사 찰나의 순간을 생생하게 남기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샤워하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밖에서 듣노라니 귀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문을 살짝 열어 쪼꼬미 모습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변태 소리를 또 들을 수는 없다. 이건 자존심 문제니까. 흥. (2022)
요즘 사춘기 문턱에 서 있는 아이와 말다툼 할 때는 이런 기록을 보며 ‘아, 그래도 이런 기쁨들이 있었지’ 위안 삼기도 한다. 다이어리에 때로는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때로는 사소한 순간들을 담았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글도 쌓였고 어느새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었다.
최근 김민섭 작가의 에세이 <당신은 제법 쓸 만한 사람>을 읽으며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고한 은유 작가의 글에 왜 그렇게 공감했는지 제대로 알게 됐다.
김민섭 작가는 “자신을 기록하는 동안 ‘나라는 타인’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라며, “결국 자기 몸에 새겨진 글들을 발견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가장 먼 타인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쓰고 또 써내는 개인의 고백 위에 바로 설 때, 진정 제대로 자신을 마주해 볼 수 있어서다. 글쓰기를 찬양하는 여러 작가의 말을 이제 전심으로 이해한다.
글쓰기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정성을 다해 자신을 보듬고 채우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모여 ‘쓰는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 그 과정을 거칠 때 주변과 세상으로 시야를 넓혀 볼 능력치도 생기는 게 아닐까.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줄 안다는 통속적인 말도 여기서 기인한다.
적당한 때에 다이어리 곳곳에 남겨진 잡문이 알맞게 다듬어져 타인에게 가 닿을 수 있길 바란다. 나만의 언어를 갖게 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길 기도하며, 게으른 기록자는 오늘도 글쓰기의 지평선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만우 원고 마지막 수정 완료. 아직 불 켜진 집들이 있다. 홀로 깨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위로받는 밤. 저들도 무언가 쓰면서 자신을 돌보고 있을까. 누군가의 불면으로 탄생할 아름다운 언어들을 상상한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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