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라면과 빨간 립스틱
박세리
한 사람의 삶과 그 가운데 내린 결정을 마땅히 존중했어야 했던 순간, 거침없이 평가했던 지난 나의 무례의 나날들을 기록함으로 반성한다.
K는 아이가 하나 있는 돌싱이었다. 화려하게 생긴 외모 덕분에 늘 주변에 남자가 맴돌았다. 당시 막 대학생이 된 나는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느지막하게 문을 열고 청소와 정돈, 재고 체크와 주문, 서빙을 담당했다. 마감은 K가 도맡아 했고 내 할 일을 마치면 한가로운 카페에서 대여섯 시간 사장과 수다를 떨다 귀가하는 지금으로 치면 꿀잡이었다.
주변 상점 사람들이나 단골손님들은 나를 K의 조카쯤으로 오해했는데, 그녀의 과보호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예의 없는 손님이 오면 서빙은커녕 주방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오게 하는 데다가 오픈전까지 카페에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자연스럽게 가게 한쪽에 내 전용 테이블이 생겼다. 영업 전의 카페는 나만의 전용 공간이었고 한여름 시원한 에어컨과 한겨울 따뜻한 난로도 내 차지였다. 그땐 알바생 처지에 그게 얼마나 큰 특권이자 따뜻한 배려였는지 알지 못했다.
K가 그토록 내게 마음을 쓴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미처 젖살이 빠지지 않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여자아이에게 삶의 고단한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이제 막 사회에 나온 나에게 그녀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꽤 부유하게 살았던 K는 가난한 고학생을 사랑했다. 집안의 반대를 꺾고 결혼에 성공했지만, 남자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돈과 떨어져 살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 가난은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남겼고,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사랑은 끝내 벼랑 끝에 다다랐다.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어느 바람 따뜻한 날, K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떠났다. 그리고 친정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카페는 주변의 염려보다 꽤 잘 유지됐다. K는 싹싹했고 선을 지키는 사람이어서 단골손님이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는 술 마신 다음 날이나 비 오는 날 가게에 일찍 나와 너구리 라면을 끓여 먹는 습관이 있었다. 살짝 불은 라면을 좋아했고 음식 솜씨가 좋아서 라면도 먹음직스럽게 끓였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호로록거리며 냄비를 깨끗이 비워내곤 했다. K는 항상 붉은색 립스틱을 발랐는데, 놀랍게도 어떤 음식을 먹어도 립스틱이 번지거나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와의 추억 때문일까. 지금은 나도 K가 쓰던 립스틱 브랜드를 사용한다.
그 일은 이른 시간에 출근해 그녀와 너구리 라면을 먹던 추운 겨울에 일어났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할 무렵 “오늘은 손님 없겠다. 이따 저녁으로 뭐 먹을까?”라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아직 영업 전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곧장 K에게 바짝 다가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K는 중심을 잃고 소파로 넘어졌다. 그녀의 높은 구두가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간녀라는 말의 출처를 머릿속으로 추적하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외쳤다. 어떻게 상황이 정리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 뒤 ‘그분’이 오셨던 것 같다. K는 그날 가게를 열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주 후, 그날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K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자신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해맑게 웃었다. 기억 속의 그녀는 천진한 모습이다.
K가 사랑하는 그분은 대기업 임원쯤으로 보였는데 한 달에 두세 번 늦은 시간에 찾아와 가볍게 담소를 나눈 뒤 일어나는 젠틀한 분이었다. 그 사건이 있기 전, 두 사람 사이를 막연하게 짐작했을 뿐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친우(親友)와 플라토닉 사랑의 경계에서 서로를 지키느라 애쓰고 있는 것 같아 은근한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나니, 연민은 혐오라는 감정으로 너무나 쉽게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 일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인간의 심지(心志)란 때론 빈약하기 짝이 없어 자기 형편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손바닥 뒤집듯 한순간에 뒤집히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두 사람을 어떤 눈으로 봐야 할지 몰라서다. 행여 눈빛에 정돈되지 못한 까슬한 감정들이 묻어나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거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이듬해 봄 K는 전화로 가게를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분 발령지 근처로 가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수년 후 우연히 K와 연락이 닿아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사랑도 이어갔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분은 가정을 버리지 않았다. K가 여전히 불리한 사랑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연민과 답답함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때는 두 사람의 관계를 수용할 만한 깜냥이 없었다. 어렸고, 어리숙했다. 그저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는 기분으로 그분을 무책임한 사람으로 이해했고, K를 한심한 여자로 결론지었다. 그렇게 K와 짧은 안부를 나눈 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K와 함께 맛있게 끓여 먹던 너구리 라면과 붉은색 립스틱이 생각난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녀는 붉은 립스틱과는 어울리지 않는 청순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지워지지 않는 붉은 립스틱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K만의 다짐이 아니었을까. 당시 그녀보다 훨씬 나이 든 지금에서야 자신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며 해맑게 웃던 모습 뒤 감춰진 외로움이 보이는 것 같다. 다시 만난다면, “당신의 삶도 고단했겠다”라고. “그분이 찾아오지 않는 날들을 버티느라 애썼다”라고. “풋내 가득했던 시절의 나를 보듬어 주어 고마웠다”라고. 이 모든 말들을 품 가득 꾹꾹 눌러 담아 오래도록 안아주고 싶다.
어쩌면, 그들은 친우(親友)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했던 사랑이란 구태의연한 말 없이도 나눌 수 있는 깊은 교감, 그 온기일 거라고 짐작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테이블 너머 창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겨울날이 아직도 선하다. 음악과 따뜻한 차와 웃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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