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문장을 쓰기 위한 용기
최은희
나는 일기를 쓸 때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읽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데도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길 주저했다. 며칠 전 우연히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봤다. 도날드덕이 그려진 보라색 표지를 넘기자 삐뚤빼뚤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1997년 1월 21일, 22일, 24일... 한 장 한 장 종이는 넘어가는데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기분을 느끼며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글 쓰는 재주가 없었구나.’
무심코 지나치려던 순간, 12살 어린아이에게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사춘기가 시작돼 불안한 마음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루과이라운드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었고 매일 밤 부부싸움을 일삼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 대신 신토불이 하자는 다짐이 들어있었다. 그러고는 뭐든 다 괜찮다고 즐거웠다고 한다. 힘들었던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일기에도 담지 못했던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며칠 전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경향이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2시간에 걸친 심리테스트의 결과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은 게 문제라면 문제지. 그런데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선생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내가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어두운 면을 드러내길 꺼린다는 걸 알았다. 힘들고 아픈 이야기는 하지 않고 좋은 이야기만 하니 잘 보이려는 모습으로 비쳤겠지. 아마도 가까운 이들을 지키고 보호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 혼자만 힘들고 말지 상대방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힘듦을 토로하면 누구보다 많은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셋방살이하듯 내 마음도 위안을 얻었다.
상담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표현하며 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해본 적도, 배운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 번도 결혼을 후회한 순간이 없다고 하셨다. 방바닥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깨진 접시에 찔려 피가 나도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때 엄마가 울부짖으며 집을 나가거나 전화통을 붙잡고 하소연을 해댔다면,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을까?
딱 한 번 엄마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보험사 로고가 박혀 있는 투박한 노트였다. 일기 속에서 엄마는 울고 있었다. 너무 슬프면 눈뿐만 아니라 온몸이 떨리나 보다. '위도 울고 십이지장도 울고 소장도 운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일기장을 본 다음부터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다. 눈물을 삼키고 웃는 법을 배운 덕분인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태연하게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졌다. 취업을 앞두고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말도 안 되게 눈물이 나는 거다.
Q. 귀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과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바로 저희 어머니입니다.
이유는....
한동안 모니터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일기에도 담지 못했던 마음이 자소서란 글쓰기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진짜 이야기는 터져 나온다.
진짜 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에는
참을 새도 막을 새도 없이 눈물부터 터져 나온다.”
고수리 작가의 <마음 쓰는 밤>에 나온 문장처럼 참을 새도 막을 새도 없이 뜨거운 것들이 터져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숨기기에 급급했던 나의 진심, 셋방살이하듯 얻은 손바닥만 한 위로로는 더이상 달랠 수 없는 나의 솔직한 이야기가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주워 담을 새도 없이 흐르던 눈물이 자소서로, 노트 한 귀퉁이의 쪽글로, SNS의 게시글로 모여들었다. 마침내 만우라는 이름의 글쓰기 동지들을 만나 함께 완성된 글을 쓰면서 나의 글쓰기는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하얀 바탕의 모니터를 바라보면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다. 잊었던 지난날을 헤집으며 마음에 알맞은 단어를 찾는 과정은 커다란 바위를 안고 깊은 물속으로 한 없이 빠져드는 것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닥에 탁 닿는 순간이 오는데 그땐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닌 데도 이상스레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소서에 엄마 이야기를 쓰며 시작된 글쓰기로 알게 됐다. 그때 엄마는 글로 마음을 풀고 있었다는 것을. 일기를 쓸 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나와는 다르게 엄마는 고통으로 뒤틀린 삶도 고스란히 엄마의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에게 마음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엄마는 삶으로 가르치셨는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훔치고 다음 문장을 쓸 용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