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을 각성하라
김옥경
요즘 삶의 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늘과 바람과 커피와 맥주’라고나 할까. 그렇다. 커피와 맥주다.
아, 커피! 생각만 해도 따뜻해 죽겠네. 요즘 대세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라지만 커피는 자고로 뜨거워야 제 맛. 나는 사계절 내내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서 살살 마시고 있자면 세상의 근심 걱정마저 사르르 넘어가는 기분이다. 천천히 불어서 느긋하게 마시는 커피는 마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가 된 기분이 들게 한다.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들이켜 입천장은 물론 목구멍까지 데인적도 수십 번이지만 그래도 나는 뜨거운 커피를 애정한다.
커피의 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된다. 검은색 발뮤다 포트에 경건하게 물을 올리고 싱크대 서랍장을 열어 어제 막 볶아온 원두를 꺼내 스틸 재질의 수동 분쇄기에 넣는다. 드르륵. 드르륵... 은 사실 너무 귀찮고, 서랍에서 믹스커피를 꺼낸다. 긴 머그잔을 꺼내 믹스커피 알을 한 번에 솨악~, 쪼르륵 끓는 물을 붓는다. 아. 뜨겁고, 고소하고...이것이 바로 진시황제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불로장생의 맛이 아닐까.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잠 깨기에 필요한 카페인과 허기를 달래줄 당 충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최적의 각성과 맛을 가졌다. 이른 아침 빈속에 먹는 믹스커피는 빈속에 마시는 맥주와 비슷한 느낌적인 느낌인데, 한마디로 “캬~” 속이 쓰리다. 그래도 쓰린 속을 위해 최대한 바글바글 끓인 물을 부은 커피를 따뜻하게 식혀 먹고 낮에는 나의 소중한 뼈를 위해 우유와 커피를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카페라테를 마신다. 훗, 이토록 치밀한 나란 여자. 호모 커피엔스!
또 하나의 낙은 맥주! 술이라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먹어보게 되었는데 대학 때는 이제 막 어른이 된 허세의 조력자로,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회식 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대범한 대변자로, 누가 봐도 회사원인 무렵엔 고단함의 최고 동반자로 늘 나와 함께 했었다. 심지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이 잘 받는 체질이란 말씀! 허허.
결혼 후에는 임신과 출산, 모유 수유로 7~8년간은 1년에 한두 잔씩 맛있고도 아쉽게 마셨던 것 같다. 둘째아이가 어린이집에 입학 할 무렵, 다시금 나의 술 인생이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내 몸을 빌려 아이들의 일용할 양식을 먹이는 일은 끝났거니와 때마침 기가 막힌 술 동지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요즘의 나는 맥주를 선호한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들은 애석하게도 이제 마흔이 훌쩍 넘은 내 몸이 받아주질 않는다. 그리고 결혼 전처럼 시끌벅적한 시내에서 약속 잡고 예쁘게 차리고 나가 날이 좋아서 한 잔, 날이 좋지 않아서 한 잔, 젊음의 열기와 함께 마시는 술이 아니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맥주가 제격이다. 500ml 한 캔은 가뿐하다. 가뿐하고 기쁨이기까지.
사이다 보다 적은 맥주의 탄산은 잠시 잠깐 톡 쏘는 맛으로 여름 긴 낮의 고단함을 달래 주고, 라테 보다 조금 더 많은 거품은 겨울의 긴긴밤을 덮어준다. 어떤 날은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오늘은 무조건 마실 테니 말리지 말라’ 고 작정을 하는데 이 때 마시는 맥주는 마음에 남은 걱정과 근심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방편이 된다. 일명 우울한 기억 치팅데이. 가끔씩 그저 흥겹게 마시며 이야기하고 웃어대는 몇 시간은 우울에게 내어준 마음에 잠깐이라도 가벽을 세워 즐거운 기억으로 메우는 기분이 든다. 다음 날 아침에 쓰린 속을 잡고 후회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젯밤 느낀 기분은 꿈이 아니라는 증거 같아 그저 내 인생에 담아 둔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은 맥주.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우울한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한약이라도 한재 먹어야겠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의원에 갔는데 주치의가 나의 맥을 짚더니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 맥으로는 일상생활도 힘들 텐데 어떻게 일도 하고 살림도 다 하시나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의사는 내 비루한 몸뚱이 중, 그나마 가녀린 손목을 잡아서 그런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았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다시 한 번 보세요. 이렇게 건장한데.’
의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금은 정신력으로 지탱하고 있다며 한약처방은 물론 각성으로 나를 버티게 해주는 커피와 맥주도 끊기를 강력히 권했다. 카페인과 알코올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며 각성의 삶을 종료하길 간절히 바라셨다.
‘제가 쓰러지면 맥주 한 모금 또르르. 뜨거운 커피 향 한 움큼 사뿐히 뿌려주고 가옵소서. 흑.’
‘희. 노. 애. 락’ 중에 나의 낙인 커피와 맥주를 끊으라니 이제는 무슨 낙으로 사나 싶어 낙낙했던 마음이 녹록치가 않다. ‘희. 노. 애’ 로만 살 수가 있나? ‘락’ 이 없으면 ‘희’ 도 없는 법. 그럼 ‘노.애’로 살란 말인데 그럴 바에는 그냥 각성을 각성해 각성의 노예로 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각 밤 11시 38분. 오늘 밤에도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운다. 맥주 거품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삶의 의욕이 질척거리게 강해서 끝끝내 맥주와 커피를 참아내는 야욕을 발휘! 곧 한약이 끝나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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