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식의 등장
박세리
어느 날부터
우리 집 식탁에 간편식이 등장했다. 작년부터는 냉동 볶음밥, 냉동 핫도그, 샤부샤부 밀키트 등 몇몇 종류가 추가 됐다. 그중 가끔 먹던 즉석밥은 이제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쥐어짤 체력도 없는데 배달 음식은 먹기 싫거나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밥할 여유가 없을 때, 못 이기는 척 즉석밥을 뜯는다. 수년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찬장 가득 즉석밥을 쌓아놓고 지내는 연예인을 보고 혀를 끌끌 차 놓고는 세상에, 그걸 내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꿈꾸며 버티던 체력이 더는 제 기능을 못 하기에 선택한 차선이지만, 직접 겪고 나니 스스로가 참 겸연쩍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제법 크고부터 ‘재료 선택에서 조리까지 직접 해 먹여야 괜찮은 엄마’라는 이상한 부담감으로부터 조금 놓여난 이유도 있다. 바닥난 체력으로 짜증을 참아가며 부엌일 하는 엄마보다 ‘기분 좋게 눈 맞추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 나누며 간편식이라도 함께 먹는 엄마’가 차라리 낫겠다 싶은 마음이 간편식 등장에 영향을 주었다.
어쨌든 즉석밥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간편식들을 두루 접해본바, 그중 가장 가성비 높은 제품은 즉석밥과 컵밥이다. 즉석밥은 밥솥에 밥이 없을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고 즉석밥의 진화 버전인 컵밥은 여행이나 캠핑 등 간편하게 한 끼 해결할 때 좋다. 특히 컵밥은 즉석밥과 짜장, 카레, 제육볶음, 강된장, 곤드레나물 같은 완제품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비비거나 부어 먹는 간편한 조리법이 장점이다. 물론 맛과 가격, 종류 면에서도 별 다섯 개는 충분히 줄 만하다. 어중간한 음식점보다 그럴싸한 맛을 내니 여행 중에도 한 끼 정도는 선택지에 넣어둔다. 가격도 온라인 쇼핑몰 기준 평균 1,800원~4,800원 사이라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착한 편이다. 종류도 한식, 중식, 양식, 분식 등 약 40~50가지 정도로 꽤 다양해 소비자 입장에서 삼박자 다 갖춘 제품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면 컵밥의 유용성은 빛을 발한다. 최근 남편이 급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굶지 않고 수발들 수 있었던 건 컵밥 덕분이었다.
푸드테크의 놀라운 능력
병실에서는 커튼 한 장으로 겨우 서로의 시선만 가린 채 옆 병상과 많은 것들을 공유한다. 특히 냄새와 소리는 ‘네 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되는 곳’이다. 소음은 귀마개나 이어폰으로 어찌저찌 막아낸다 해도 냄새는 막을 방도가 없다. 누워서 대소변을 보는 와상환자와 섭식이 가능한 환자가 뒤섞여 제3의 냄새를 만들어 내는데 후각이 예민한 내게 병실 환경은 상당한 고역이다.
남편이 입원했을 당시 옆 병상에 고령인 할아버지가 계셨다. 와상환자인 할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진득한 가래를 뱉어내며 생생한 오디오와 더불어 특유의 냄새를 풍겼다. 문제는 그 순간이 식사 시간일 때다. 온갖 음식 냄새와 저마다 풍기는 체취, 거기에 제3의 냄새까지 더해지면 오던 허기도 절로 수그러든다. 그렇다고 식사 시간을 놓치면, 그것은 그것대로 곤란하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움직이기 불편한 남편을 두고 밖으로 나가기도 마뜩잖은 상황. 한두 수저라도 뜨고 치워야 자릴 지킬 수 있으니, 그때야말로 컵밥을 구원투수로 등판시킬 적절한 순간이다. 컵밥을 데워 쓱쓱 비벼 딱 한 수저 입에 밀어 넣으면 조미료의 감칠맛이 내 후각 세포들까지 붙들어 예의 특유한 냄새를 능히 감당할 수준으로 만든다. 언제 어디서든 균일한 맛을 구현하는 푸드테크의 기술이 오롯이 담겼달까. 컵밥은 죽음의 냄새와 삶의 냄새가 공존하는 병원에서 든든한 조력자이자 에너지원이었다.
간편식, 선택이 아닌 생존 문제라면
그럼에도 즉석밥을 집 식탁에 올릴 때, 나는 종종 죄의식을 느낀다. 형편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밥은 네 손으로 해 먹여야지”, “인스턴트 많이 먹어서 그렇다.” 같은 말들이 떠오르는 탓이다. 편리함으로 얻게 되는 나의 유익이 가족 건강에 해를 준다는 해석이 전제된 말은 듣고 넘기기가 쉽지 않다. 사실 대다수 간편식 제품에는 감칠맛이나 유통기한을 보장하기 위해 수백 가지의 식품첨가물이 사용된다. 식품에 흔히 사용되는 합성보존료나 발색제가 몸에 좋을 리 없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한정된 시간과 체력 때문에, 간편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을. 간편식은 내게 선택이 아닌 생존 문제다. 그렇다고 기죽을 사람은 아니라 자료를 좀 찾아봤다. 간편식을 이용하며 나처럼 죄의식을 느낀다면 당당해지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국내 간편식 시장 규모는 2016년 2조 원대를 시작으로 2020년에는 4조 원대로 커졌고, 올해는 5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이미 소비층의 다양화도 시작됐다. 간편식을 이용하는 세대가 3040 여성이나 1인 가구일 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근 자녀를 독립시킨 5060세대 비중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또 우리나라 간편식은 K-푸드로 널리 알려지며 글로벌하게 세를 확장 중이다. 폭넓은 세대와 지역이 다 같이 겪는 트렌디한 변화랄까. 삐삐에서 핸드폰으로 핸드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진화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문득, 가까운 미래 주방의 민주화를 위해 전면 간편식 도입을 고려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어쩌면 함께 살고 있는 남편도 간편식 키트를 통해 요리라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면 노년에 이르러 살림에서 아예 손을 떼버리는 버킷리스트 하나쯤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아이는 스스로 밥을 챙겨 먹을 만큼 커간다. 나도 이제 5060으로 가고 있으니, 간편식을 이용할 땐 좀 더 당당해지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