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주의자의 고해성사
최은희
내가 기억하는 추억의 음식 속에는 고기가 있다. 엄마가 생일마다 끓여준 고소한 소고기미역국, 졸업 기념으로 먹었던 달콤한 돼지갈비, 외식의 단골메뉴 탕수육, 시장에서 사 왔던 갓 튀긴 통닭까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어릴 때는 고기가 귀해서 동생과 고기를 두고 늘 쟁탈전을 벌였다. 두 개 밖에 없는 닭다리를 한 사람이 차지하기도 하는 날엔 울고불고 땀을 뻘뻘 흘리도록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1인 1닭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닭다리와 날개만 조리해서 파는 메뉴도 생긴 마당에 그때를 떠올리니 웃음이 난다. 나중에 크면 마음껏 고기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기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보니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고기가 귀할 땐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고기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지 식탁 위에 오르는 고기가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는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13년 전 본 뉴스 한 편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현재까지도 체기를 느끼게 한다.
13년 전, 그러니까 2010년은 구제역이 크게 창궐한 해였다. 무려 350만 마리의 소·돼지 등이 구제역으로 희생됐다. 구제역은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우제목 동물에서 발병되는 바이러스성 가축전염병으로 명확한 치료법이 없어 병에 걸린 동물은 살처분된다. 원칙상 동물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안락사'용 약물을 사용해야 하지만 전국적으로 퍼진 전염병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당시에는 산 채로 동물을 매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뉴스에서 살아있는 돼지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는 모습을 봤는데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돼지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돼지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그들은 그저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났을 뿐 문제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었다. 더 많은 고기를 값싸게 이용하고 싶다는 욕심이 밀집사육 환경을 만들었고 열악한 환경 탓에 면역력이 떨어진 돼지들은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눈엔 그 광경이 꼭 성경에 나온 번제(燔祭)처럼 보였다. 번제란 구약 시대에 행해졌던 제사 형식 중 하나로 제물을 전부 태워 드리기에 번제라 불린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에 제물이 된 양과 염소, 비둘기 등에 죄를 전가시키고 그들을 희생하여 드림으로써 속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구덩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자들은 끝없이 욕심을 부리고 있는 인간이 아닐까. 그런데 돼지가 대신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만 같아 무거운 죄책감이 느껴졌다.
뉴스를 본 이후 여태껏 돼지고기를 먹은 내가 야만인 같았다. 돼지고기가 마트에서 파는 상품이 아니라 살아있던 생명의 몸이란 생각이 들자 구토가 나왔다. 육식을 멈추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 없으리란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없으므로 반드시 다른 생명을 취함으로써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이 아니라면 곤충을, 곤충이 아니라면 식물을 먹겠지. 그들 모두 소중한 생명이란 점에서 무엇이 더 낫다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풀리지 않는 숙제는 13년의 세월 동안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반복됐다. 결국 굴러 떨어질 바위를 끊임없이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고기를 먹는 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고기를 끊을 수 없는 모순이 한없이 반복됐다.
목구멍의 가시 같던 그 일은 엄마의 죽음을 겪으며 서서히 풀려갔다. 생전 어떤 삶을 살았건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종국엔 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목도했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 돼지가 먹을 토마토의 싹을 틔우겠지. 인간도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란 사실 앞에 저절로 겸허해졌다. 아무에게도, 그것이 인간이 아닌 동·식물일지라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음을 깨닫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물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발달한 뇌를 가졌음에도 끊임없이 살생을 반복해야 하는 모순 가득한 인간의 삶을 이제는 받아들이려 한다. 생이 마무리되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순간이 오면 나도 용서받을 수 있겠지?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나를 위해 스러져간 생명들의 못다 한 이야기라 생각하니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일 자체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넓은 대지에서 새끼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고 싶던 돼지의 꿈과 소의 미래, 닭의 행복을 먹고 살아가는 나는 반드시 의미 있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한다.
나는 왜 이렇게 작은 일 하나 쉽사리 넘어가지 못하고 피곤하게 사는 인간인가 싶다가도 끝내 눈감아지지 않는 일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고 나는 또 고기를 먹겠지만 나의 마음만큼은 달라져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