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철학-
평범 예찬
최은희
스무 살 무렵엔 연말만 되면 우울해지는 홀리데이 블루스(Holiday blues)에 시달렸다. 11월부터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럴과 반짝이는 조명 장식에 들뜬 마음은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촛불은 끄는 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운명적 사랑을 부추기는 로맨틱한 영화들에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샴페인을 마시는데 현실은 2시간 대기해서 먹는 파스타와 5만 원짜리 원피스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애꿎은 남자친구에게 불만을 터트리며 일주일간 냉전을 유지하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며 탄식하는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곤 했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꿈만 꾸면 이뤄질 듯 고무되어 희망을 말하고 사람들의 얼굴엔 기쁨이 넘쳐났다. 고작 하루 만에 말이다.
마흔을 앞둔 지금은 연례행사였던 홀리데이 블루스를 겪지 않는다. 연말 특수를 노리고 거금을 들여 트리를 장식하고 광고를 하는 상술에 휩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에 나를 대입하거나 SNS에 올라온 지인들의 화려한 사진을 보고 나를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자각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왔다.
어릴 땐 내가 정말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좋아하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으며 불행이 나를 피해 갈 거라 생각했다. 삶의 경험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부모의 넘치는 사랑이 내가 슈퍼맨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왔다. 실패를 거듭해도 특별함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를 위해 희생한 부모의 기대를 쉽사리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하다’를 넘어 ‘특별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보면, 나를 꼭 닮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부족함 없는 집에서 풍족한 사랑을 받고 자라난 베로니카는 성인이 될 무렵 삶에 허무를 느껴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인 그녀에 대한 평가는 홀리데이 블루스를 겪으며 특별함과 평범함, 부모의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진 (부모의) 사랑을 증오했다.
그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자연법칙에 반하는 부조리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 사랑은 그녀를 죄책감으로 가득 채워놓았고,
그녀가 꿈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랑의 기대만큼은 충족시키고픈 욕망을 그녀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그 사랑은, 언젠가는 그녀도 삶의 험난함과
세상의 추악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것들에 맞서야만 하리라는 필연적인 현실을 외면한 채,
긴 세월 동안 그것들을 그녀에게 감추려 들었다.”
자신에게 쏟아진 사랑을 증오하고 삶을 끝내고자 입 안으로 수면제를 털어 넣었던 베로니카는 정신병원에서 눈을 뜬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베로니카의 삶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랬던 그녀는 심장 이상으로 일주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자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의 사랑이란 거대한 보호막 속에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이 드러난 순간 알게 된 것이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대전제에 자신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이상했다. 육아서에는 모두 아이에게 ‘너는 특별하다’고 말하라고 나온다. 그런데 특별하다는 말이 아닌 ‘너는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소설 속 베로니카의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홀리데이 블루스를 겪는 나에게 위로가 되어 주다니 말이다. 이것은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자각, 즉 평범하다는 생각이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반증한다. 스스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깨닫는 순간을 단순히 자존감이 떨어진 거라 여겼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실마리를 주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다.’는 생각을 지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특별하다는 말속에는 남과의 비교가 전제되어 있다. 곧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교적 우위에 서 있다는 무의식이 깔려있는 셈이다. 그래서 본인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자존감이 떨어졌다’ 즉, 남들과의 비교 과정에서 다운그레이드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판단 과정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장과정을 거치며 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주변 인간관계 즉, 비교군이 변화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는 가족, 학창 시절에는 또래 친구들, 성인이 된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됨으로써 비교군이 확장되어 ‘나’라는 존재의 상대적 위치가 변화하게 된 것인데, 마치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만 존재하던 세상에서 내가 특별한 것이 당연했던 것처럼 우주 속의 개인이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자명한 일이다. ‘나는 평범하다.’는 말을 존재의 위치가 변화된 것이 아닌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시야가 확장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또한 자신에 대해 더 폭넓은 정의를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정의는 젊고 반짝이는 ‘나’ 뿐만 아니라 나이 들고 초라해질 ‘나’를 받아들이는 말이며 자신의 약점 또한 기꺼이 품고 그것 또한 모두 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함의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평범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말은 불행 앞에서 나 또한 예외가 아님을 시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언제든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음을 뜻한다.
평범하다는 자각은 오랜 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고민한 자신의 자아상이고 특별해야만 한다는 각종 상술과 SNS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며 우연히 다가올 행·불행에 대한 의연함이기도 하다. 그러니 평범함을 어찌 예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 ‘당신은 특별해요’를 넘어 ‘특별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화려한 조명 아래 여유로운 호캉스를 즐기고 있는 인플루언서의 사진을 보며 스스로를 소모시키지 말고 현대사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통찰을 제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질문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새해? 도대체 우리는 12월 31일이나 1월 1일에,
특히 새해 전날과 첫날을 구분 짓는 그 마법과 같은 순간에
무엇을 기념하려는 것일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
사실상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 큰 차이점은 없다. 평범한 하루를 붙잡아 한 해의 마지막이니 처음이니 이름을 붙이고 사람들은 무엇을 기념하려는 것일까. 강요된 특별함이 아닌 진실된 평범함이 아닐까.
조금은 지루하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노력들을 기념하자. 건강, 경제적 상황,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의 마음 상태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도록 평평하게 유지하려 애썼던 시간을 기억하라. 당신이 지금껏 살아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면 다가올 새로운 날은 하룻밤 눈속임 같은 희망이 아닌 단단한 희망으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출퇴근과 집안일, 예외 없이 겪을 병치레와 울고 웃을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평범한 날들을 환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