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me by my love
이동미
# 프롤로그 : 어쩌다 자기소개
쓰면서 생각했다. 만우 시즌 2의 첫 주제가 어쩌다 ‘자기소개’가 됐을까? 타인에게 나의 무엇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첫 문장부터 막막하다. 40대 아줌마에게 자기소개란 선뜻 내보이고 싶지 않은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 워킹맘이라는 현실을 소개랍시고 하고 나면 ‘이게 진짜 나인가?’ 곱씹게 된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달팽이처럼 이번 원고를 썼다. 쓰고 지우며 민망해하기를 수십 번, 덕분에 미간의 여덟 팔 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 에피소드 1. 아들의 자기소개
스카니아*. 얼마 전 비대면 화상 회의 프로그램에 로그인 하자 화면에 낯익은 네 글자가 떴다. 가족 공용 계정이다 보니 그때그때마다 로그인 한 사람이 사용자 이름을 바꾸는데 스카니아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아, 이전 사용자가 아들이었구나!
* 스카니아 (Scania AB): 스웨덴의 중공업 기업으로 주로 트럭, 버스, 산업용 디젤 엔진을 생산한다. 대형 트럭 분야에서 다임러 AG, 볼보그룹에 이어 세계 3위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네이버 검색-
아들은 손에 무언가 잡을 수 있을 때부터 미니카를 유독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차체에 무언가 탑재할 수 있는 대형 트럭 라인만 고집했다. 별나다고 생각했지만 남자 아이라면 으레 그러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 기호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10년 동안 이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주변에 물어보니 보통 아드님들 취향은 자동차나 팽이, 변신로봇에서 레고, 히어로 굿즈로 바뀐다는데 우리 집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트럭을 향한 그의 일편단심은 지고지순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나가는 트럭의 전면 엠블럼이 아닌 운전석 옆 라인만 보고도 어느 제조사 트럭인지 맞추는 아이. 신통방통하여 어떻게 그걸 아냐고 물어보면 남편이 웃으면서 대신 말한다. 그건 사랑하면 보이는 거라고. 그렇다. 스카니아는 아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애정의 대상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이름마저 자신의 사랑이 집결된 스카니아로 불리기 바라는 아들은 엄마보다 스스로를 더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그날, 순수하고 용기 있는 열세 살 소년의 기록을 차마 수정할 수 없었던 엄마는 온라인 강의에서 ‘스카니아님’으로 호명됐다.
# 에피소드 2: 자기소개서 속 과거의 자화상
가볍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소개는 나에게 ‘자기소개서’로 직결되기에 결코 가벼울 수가 없었다. 학업과 취업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인생에서 가장 쓸만한 글감들만 골라 쇼케이스의 먹음직한 디저트처럼 진열한 글, 그것이 나의 자기소개서였다. 특히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판가름 하기에 자기소개서는 시작 전부터 쓰는 당사자를 묵직한 부담과 고통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 강렬한 욕망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써냈다. 삶에서 고군분투하며 얻은 경험과 생각, 경력을 부정당할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괜찮은 척, 자신 있는 척, 그렇게 진심을 감추며 가식의 문장들을 이어 나갔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마치 화려한 꼬리 깃털을 펼쳐 암컷에게 구애하는 수컷 공작이 된 것 마냥 소름이 돋았다.
자기소개서에서 나를 만난다. 대학 입시를 앞둔 열아홉 살 고등학생, 스물세 살 취업준비생, 스물여섯 살 늦깎이 막내 작가, 서른 초반의 프리랜서.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하나같이 긴장하고 초조한 표정이다. 그 때마다 보여주고 싶고 해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강했다. 하지만 자기소개서 앞에서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발동해 나답게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그 때의 아쉬움과 답답함이 체증처럼 올라와 자기소개서하면 여전히 숨을 깊이 들이쉬고 손에 땀이 나는 모양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소개서에 자신을 어떻게 담아냈을까? 그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인생을 어떤 단어로 선택해 소개했는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 에필로그 : 또 다른 자기소개서를 구상하며
퍼스널 브랜딩을 논하는 요즘, 다시 한 번 자기소개의 압박이 시작되고 있다. SNS 계정을 만들어도, 새로운 모임을 시작해도 정체성을 묻고 답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이제 자기소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심각한 다큐멘터리 모드가 되지 않게, 통성명하듯 가볍게 나를 이야기 해 보자고 다짐한다.
스카니아. 아들의 비대면 화상 회의 프로그램 이름을 소환해 읊어본다.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에 대한 단순하지만 정확하고 솔직한 표현. 이 돌직구같은 자기소개의 여운이 이렇게 강렬할 줄이야. 그 여운의 파장을 안고 생각해 본다. 나의 스카니아는 무엇일까? 이후 다시 쓰게 될 자기소개서에서 오롯이 나만의 애정이 담긴 그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