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것 그리고 나인 것
최은희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5반 최은희입니다.’가 내 소개의 전부였던 시절, 학교 대표로 ‘EBS장학퀴즈’에 나가게 됐다. 한 시간여에 걸쳐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에 도착한 뒤 방송국 로비에 모여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들과 시험을 치렀다. 학교를 대표한다는 부담감과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을 거란 과한 기대감에 제 실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난생처음 면접을 봤는데 그때의 당혹스러움이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다음 학생 자기소개해 보세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 5반 최은희라고 합니다.”
“그래요. 여기 있는 학생들 다 고등학생이에요. 그거 말고 은희 학생이 왜 이 프로그램에 나와야 하는지 설명해 보세요.”
“음…그러니까…그 이유는…저니까요.”
“그러니까…학생이 왜…?”
“그러니까 그게…제가 최은희니까….”
“….”
별로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을까? 속상하기도 창피하기도 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한없이 투명해져서 내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송국 로비에 모여 시험을 치렀던 수십 명의 또래들이 생각났다. 각자의 학교에서 뽑힌 특별한 존재들. 그 속에서 나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들어가고자 하는 집단에 속하기 위해 나는 나를 무어라 소개해야 하는가.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자기소개란 결국 나를 선보이려는 집단에 나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자기 증명의 순화된 이름이라는 것을. 소속하고 싶은 집단과 관계를 맺고 싶은 개인이 요구하는 기준과 필요, 이익에 맞춰 나를 재단하고 포장하여 내놓는 일이 자기소개라는 것을 말이다. 이후부터 자기소개 상황에서 그때처럼 얼버무리는 일은 없었다. 듣는 사람과 상황에 맞춰 능숙하게 나를 편집하고 잘 가꾸어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볼 땐 성실하고 진취적인 사람이라 소개했고 미팅에 나가서는 쿨하고 활발한 모습을 어필했다. 독서모임에 가서는 지적인 이미지를 한껏 북돋을 수 있는 책들을 나열하며 그게 나인 양 나를 포장했다. 소속된 곳이 없던 최근엔 아이를 앞세워 나를 소개했다. ‘○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의 엄마입니다.’라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다들 몇 학년 몇 반 누구라고 말하니까. 자신의 진짜 모습은 감추고 좋은 면만 부각하니까.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학교에 갔는데 준비물을 잊고 온 것처럼, 가스밸브를 잠그지 않고 집을 나온 것처럼 자꾸 뭔가 두고 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늦은 아침을 먹는데, 티브이에서 공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유의 저음으로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밥 먹던 손을 멈추고 한 자라도 놓칠세라 온 신경을 집중해 시를 마음에 눌러 담았다.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웃음 속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에린 핸슨, <아닌 것> 중
마치 ‘당신의 아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학교는 당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내가 아니라면 나는 무얼까?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편집하여 감춰둔 나의 모습, 약해 보일까 봐 묻어둔 눈물, 유용하지 않은 습관과 촌스러운 취향 속에 내가 있는 걸까?
에린 핸슨에게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읽었던 모든 책과 하는 말, 잠긴 목소리와 미소”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이 시인이 내린 자신에 대한 정의일 테니 말이다. 시인처럼 나도 내가 읽었던 책과 하는 말로 나를 설명하려다가, 문득 이것 또한 에린 핸슨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일 뿐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는 거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정의가 아닌 나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지워보았다. 나이, 옷의 크기, 몸무게, 머리 색깔, 두 뺨의 보조개로 표현된 젊음과 건강을 지우고 나니 백발의 노인이 된 내가 남았다.
하얗고 팽팽한 피부가 아니어도, 똑 부러지는 말투로 대상에 대해 면밀한 분석을 해대는 총기가 사라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내 것이라 믿는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현실에 대한 환대일 거다. 소중하게 쥐고 있던 모든 것이 불탄 종이처럼 손에서 바스러지고 그 타고 남은 재로 목이 멜지라도, 얼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흐르고 폭발할 듯한 분노로 가슴이 타들어 갈지라도 삶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그게 바로 끝까지 변하지 않을 나의 본질일 거라 믿는다.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닌 나. 타인이 정한 기준에 맞춰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나를 소개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떤 이유로 태어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부단히 그 이유를 찾아 헤맨 사람입니다.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나를 재단하지 않는 나만의 문장을 찾기 위해 애쓰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에린 핸슨의 시를 듣게 되었어요. 그녀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 중 첫 번째로 자신이 아닌 것들을 가려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제 모습의 전부라 착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삶에 대한 긍정과 현실에 대한 환대란 삶의 태도만 남게 되었죠. 저는 살면서 어떤 일을 겪을지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싶어요. 그리고 피하지 않고 기꺼이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엘렌바스, <중요한 것은>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