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원피스를 입고서
김옥경
그날 나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해가 쨍쨍한 여름날 얇은 끈 다리 원피스를 입고 똑 단발머리에 하늘색 리본 핀을 꽂은 일곱 살의 내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양손에는 나와 동생의 옷가지를 넣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자주 가던 동네 구멍가게 앞을 지나면서 주인아저씨께 “안녕히 계세요.”라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엄마가 두 살짜리 막냇동생을 업고 나간 사이 나는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엄마 수첩에서 오백 원짜리 지폐 2장도 몰래 꺼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신촌 할머니 댁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엄밀히 말하면 엄마한테 혼난 것이 억울해서 할머니를 보러 가려고 집을 나온 것이다. 절대 가출이 아니었다.
“저희 학교 안 다녀요!” 공짜로 버스를 타고 영등포에 내려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택시를 잡았다. 할머니가 신촌 가실 때 늘 했던 것처럼. 일단 택시는 탔고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 내리려는데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우리를 내려주지 않는 거다. 분명히 놀이터 근처였는데 어느 대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놀이터에 내려주면 찾아갈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저씨는 정확한 주소를 대라고 했다. 몇 분의 실랑이 끝에 아저씨는 최후의 발언을 하셨다.
“집 전화번호 댈래? 경찰서 갈래!?”
지금 생각해 보건대 기사님 입장에서는 어른 없이 아이들만 탄 것도 이상했을 거고, 꼬마 애가 내민 돈은 택시비에 턱도 없이 모자랐을 테니 당연한 처사였을 것이다.(이 당시는 아동 유괴가 성행했던 시절이어서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준 기사님께 엄마는 큰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나를 째려보면서.)
그 일 이후로 나는 ‘쪼끄만 게 어디서 집을 나간 잔망스러운 계집애’가 되었다. 가족, 친척들이 모이면 이 일은 어김없이 회자되었고,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유년 시절 내내 이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분홍 원피스를 입은 일곱 살의 나를 자주 떠 올리곤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다. 세 돌도 지나지 않은 동생을 데리고 버스를 탈만큼 용감했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택시를 잡을 정도로 맹랑했으니 말이다. 잔망스럽던 꼬마는 그 시절을 지나 방과 후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물싸움하고 담임 선생님께 걸려 혼나도 뒤돌아서면 웃는 말괄량이 국민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홀딱 젖은 옷을 입고 내일 아침에 방송할 ‘명상의 시간’을 녹화할 만큼 해야 할 일도 놓치지 않는 어린이였다.
멋진 단복을 입는 ‘아람단’이나 ‘걸 스카우트’에 들고 싶었지만 회비가 있다는 걸 알고 회비가 없는 방송반 시험을 보았더랬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던 방송반은 기분 좋은 추억의 발원지이다.
중학교에 가서는 처음 입어 본 교복이 너무 좋던 범생이(모범 학생)었다. 진녹색 체크 치마에 남색 재킷, 프릴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가 좋아서 하교 후에도 잠들기 전까지 교복을 벗지 않았고, 손수 빨아서 다려 입는 수고를 자처하곤 했다. 그때도 방송반이었던 나는 매일 밤 작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애청했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공테이프에 녹음해 학교 점심방송 때 틀곤 했다.
잘 다린 교복을 입고 ‘다음 곡은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입니다.’라고 멘트를 한 뒤 디제이처럼 올렸던 볼륨 버튼. 카메라, 마이크, 커다란 스피커와 음향기기 등 각종 방송 장비 너머 ‘ON AIR’가 켜진 부스 안에 있으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양,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밤새워 시험공부도 하고 학급 급훈 공모 때는 내가 써낸 급훈이 뽑혀서 1년 동안 칠판 위에 걸려 있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는 나와 행운이 공존하던 나의 최애 시절이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집 할 것 없이 많은 곳에서 자유를 억압받았고 이 시기에 허락된 것은 오직 공부와 시험뿐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어 자유와 구속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곤 했다. 등교는 그런 나도 어쩌지 못한 철칙이라 학교는 꼭 갔고 수업 시간엔 내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하지만 수업 후, 밤 9시까지 이어지던 야자(야간자율학습)시간을 매일 견디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어떻게든 버텼지만 어떤 날은 교복 치마에 사복 상의를 입고 과감히 탈출하기도 했다.
딱히 어떤 게 나의 모습이라고도, 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낮 동안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희희낙락 즐겁다가도 괜히 슬펐고 밤이 되면 알 수 없는 모호함에 불안했다. 자정이 넘어 도로의 불빛마저 고요해질 때면 내 방의 커다란 창문을 열고 창틀에 쪼그리고 앉아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오직 그 까만 밤과 나누던 말들, 가끔씩 반짝이던 별들만이 방황하던 마음에 위로가 되어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나이만). 대학생이 된 나에게 세상은 대놓고 자유를 만끽하라고 했고 그래서 술과 연애로 응답했다. ‘찐’ 자유 속에서도 나름 책임감을 장착했던 나는, 세상 다양한 알코올을 들이켜면서도 상대방보다 먼저 취하지 않게 정신력을 붙들어 매었고 수많은(?) 이성의 고백에는 선택의 순간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전공 공부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이게 아니라며 편입 학원을 어슬렁거려 보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했다. 나이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세상에는 직접 해야 할 선택과 결정들이 줄지어 기다렸고 그때마다 어느 방향으로든 한 걸음씩 떼었다. 누군가는 성공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실패라고 말해도 내가 내린 결정들에 후회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고 이젠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삶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호락호락하게 곁을 주지 않았다. 신입사원에게 주어진 일은 성과와 관련 없어 보이는 단순노동이었지만 이 단순한 걸 잘 해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미스 김’이라고 불려도 참고, 연봉협상이 연봉통보가 되어도 참고, 수당 없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참았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기는 왜 우냐’라며 참는 걸 미덕으로 여기게 된 게.
이런 인내의 미덕은 결혼 후 빛을 발했다. 나이가 차면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명제였고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는 것은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였다. 행복의 나라로 이끌어줄 줄 알았던 명제와 순리를 따르는 삶, 그 속에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고 싶은 것은 참고 끝끝내 하지 말아야 했고 하기 싫은 것은 참고 기어이 해내야 했다. 마음속에 인내라는 덕목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나라는 존재는 툭툭 허물어져 갔다.
결혼 후 10년쯤 되었을 때, 나는 문득문득 나를 찾아오던 분홍 원피스를 입은 꼬마를 스치듯 보내지 않고 마음에 품고 살게 되었다. 1983년 여름, 햇빛만큼 찬란했던 일곱 살의 나와 분홍색 원피스. 내 인생에 가장 나다운 순간을 꼽자면 분홍 원피스를 입고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서던 때가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분홍 원피스를 입고서 맹랑하게 버스 타고 택시도 갈아타며 목적지로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택시가 경찰서로 간다고 해도 결코 집 전화번호를 말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제 어디에 내려도 길을 잃지 않을 테니. (택시비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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