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세 번째 여름의 인생 탐구 보고서
이동미
“아빠 나이 좀 생각해요. 이러다 쓰러지면 어떡해?”
일흔이 넘어서도 텃밭 일을 쉬지 않는 아빠에게 나는 결국 짜증을 내고 말았다.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폭염 속에서 꼭두새벽부터 오후 한나절까지 뻘뻘 땀 흘리며 일하는 아빠의 모습은 이따금 친정에 내려와 소파와 한 몸이 되는 외동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팔청춘도 아니면서 밭 여기저기에 이것저것을 심고 키우며 수확하는 아빠. 은퇴 이후 밭일은 당신의 최고 행복이요 보람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싱싱하고 깨끗한 작물들을 넙죽 받아먹으면서 아빠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밭일에 이렇게 진심인 줄 알았다면 진즉에 뜯어말렸어야 했다’는 가시돋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묵묵하게 듣고만 있던 아빠는 옥수수 한 자루를 툭 비틀어 따면서 내게 카운트펀치를 날리셨다.
“너도 나이가 드나 보다. 잔소리가 늘었어.”
아빠의 말대로 나이가 들어 잔소리가 늘어난 것일까? 그날 이후 아빠의 밭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손을 보태지 못할망정 아빠의 성스러운 노동에 초는 치지 말자는 다짐 때문이다. 뾰족하고 맵싸한 짜증 끝에 뜨거운 눈물이 핑 돌고 만다.
주름살, 흰머리, 군살, 몸에 맞지 않는 옷, 영양제, 약봉지, 메모지 등 생활 속에 하나둘 늘어난 나이 듦의 흔적들을 바라본다. 때론 제때 정리하지 못해 집안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그것들이 늙고 퍼지고 약해지는 나를 실감케 한다. 그 와중에 잔소리라는 세글자까지 더해지니까 내가 까칠하고 예민하고 유별난 사람이 된 것 같다. 오늘따라 거울에 비친 얼굴이 폭삭 늙어 보인다.
따지고 보면 억울하다. 누군들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할까? 잔소리는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듣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말하는 사람은 ‘당신을 위해 하는 쓴소리’라는 정당성을 쥐고 있으니 ‘듣기 싫어도 새겨 들어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림책과 명상을 통해 나의 고압적인 태도가 '관심이라는 이름의 횡포'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잔소리가 그 무엇도 아닌 나의 불안과 불신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행동이란 사실도 알아차리게 됐다. 어쩌면 늘어가는 잔소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커져가는 불안과 불신의 신음일지도 모르겠다.
맛도 모르는 채 꼬박꼬박 나이를 먹으며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짊어진 수많은 역할과 책임이 나의 양쪽 어깨를 짓누른다. 대학입시, 취업, 결혼과 출산, 이제는 부모님의 노후와 자식 뒷바라지까지. 빠지지 않는 나잇살처럼 인생의 무게도 도무지 가벼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당장 내 코가 석 자인데 챙기고 거들어야 할 주변 대소사는 왜 이토록 많은 걸까? 뜻대로 풀리지도 않고 풀 수 도 없는 문제들뿐이다. 애를 쓰자니 이젠 몸이 죽겠고 안 하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지옥이 따로 없다.
(아이들에게)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머리는 데코레이션이 아니란다.
(남편에게) 자기야, 대한민국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니? 힘들다고 하면 더 힘들다?
원고를 쓰면서 몇몇 잔소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공교롭게도 그 내용보다 상대방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고 당시 상황에 대한 감정의 윤곽이 서서히 잡혔다. 애정과 관심이라는 허울을 벗기고 나니 그 안에는 동정과 연민, 답답함과 안타까움 등이 뒤엉켜 있었다. 잔소리는 그 복잡한 감정들이 밖으로 새어 나오면서 만들어진 절규였다.
때론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좌절하거나 절망도 한다. 그 마음이 상대를 향한 핀잔이나 지시, 협박과 빈정거림, 원망과 신경질 등의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면 좋을 텐데. 당신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잘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되며 그것이 인생이다."
-양귀자, <모순>-
나는 마흔세 번째 여름을 살면서 인생을 탐구 중이다. 나름 하루하루 분투하며 산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짜증과 원망 섞인 잔소리를 쉽게 던진 순간들이 많았다. 나이와 반비례하는 현실과 한계, 미숙함과 어리숙함 때문에 속상한 나머지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 준 일들이 그저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비록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이 탐구를 통해 나는 소망한다. 실수가 되풀이되더라도 이불킥을 날리며 자책하기보다 나약함을 인정하는 나의 태연한 모습을. 그리고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목만 내세운 채 바른말을 하기보다 완곡한 단어와 표현으로 진심을 전할 줄 아는 유순한 나의 모습을 말이다. 그럴 수 있다면 나이가 들면서 늙어가는 순간들이 덜 후회되고 덜 허망할 것 같다. 쭈글쭈글해져 볼품없고 힘이 빠져 약해진 먼 훗날의 모습이 그래도 꽤 괜찮을 것 같다.
살아가면서 차차 알게 되고 서서히 바뀌는 것이 인생이니까. 아직 내게는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것을 적용해 볼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 탐구 보고서를 미래의 나를 위해 기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