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진영이* 너무 예쁘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나 요새 X(트위터)도 해. 유튜브에도 올라오지 않는 영상들, 새로운 소식들이 거기 올라오거든. 잠들기 전까지 진영이 영상 보고 있으면 하루가 그렇게 충만할 수가 없어.”
라며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랑에 빠진 지인은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과 시댁에서의 불합리한 에피소드를 말할 때도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서 여타의 일들은 흘러가는 일의 하나쯤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나도 한때 배우 손석구를 열렬히 사모했더랬다. 어릴 때 친구들이 H.O.T. 와 god를 좋아한다며 가슴 절절한 고백했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내가 말이다.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건 참 묘한 일이다. 연예인은 실존하지만 손에 닿지 않고, 상상 속의 인물이라 하기에는 나와 같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인간이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그 사람 자체인지 잘 포장된 이미지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인지 모르겠다. 짝사랑인 게 뻔한데 애달프지 않고 만남이 없으니 헤어짐도 없다. 이렇듯 아프지 않은 게 과연 사랑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좋은 점은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표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결혼한 아줌마가 남편 아닌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큰일이 나는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기도 하다. 중년 유부녀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 밖에 해소될 수 없나 싶어서.
최근에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인구 넷 중 한 명이 노인인 일본의 ‘실버 센류 공모전’ 입상작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실버 센류란 노인의 삶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 가득한 한 줄 남짓의 짧은 시를 말한다. 한 문장 밖에 되지 않는 구절 속에 평생의 삶이 있고 눈물이 있고 웃음이 담겼다. 그중 ‘사랑’과 관련된 시 몇 편을 소개한다.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홀딱 반했던 보조개도 지금은 주름 속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환갑 맞이한 아이돌을 보고 늙음을 깨닫는다.
이 나이에 남편 아닌 사람에게 두근거림을 느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데 그치지만 더 나이를 먹으면 질병을 의심해 봐야 한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가슴이 콩닥거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니….
처방받은 약봉지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잊고 살던 나이가 떡하니 적혀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20대인데 내가 곧 마흔이라니…. 누군가 나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의 영혼으로 예순이며 칠순을 맞이할 것만 같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가슴 떨리는 사랑을 꿈꿀까? 드라마의 연인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손가락 사이로 훔쳐보며 꺄-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경로당에 새로 온 할아버지가 멋지다며 친구에게 수다를 늘어놓고 있을까? 하아- 나는 역시나 그럴 것 같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잇값도 못한다고 할까 봐 자꾸 걱정이 된다.
소설 <은교>에는 젊고 아름다운 은교를 사랑하고 욕망하는 일흔넷의 주인공 이적요가 나온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으로 뛰어든 은교로 인해 파멸에 이른다. 그가 믿었던 제자에게 은교에 대한 마음을 들키고 모욕을 당하고 난 뒤 소리 없이 소리쳤던 말들이 나의 마음을 대변한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노시인의 처절한 고백이 슬픈 건 그의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이 듦이 축복이요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면 늙은이의 입에서 ‘늙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선언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터부시 되는 미래를 향해 필연적인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속절없이 할머니가 될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감정과 그것을 표출하고픈 욕구가 중요한 건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자 살아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살아있고 싶다. 어느 날인지 모를 죽을 날을 기다리며 반은 살고 반은 죽은 채로 살고 싶진 않다. ‘어서 죽어야지’ 말을 하지만 그 속에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는 자녀들에게 서운한 맘을 가지고, 차마 내다 버리지 못하는 손때 묻은 가구처럼 집안을 채우고 싶진 않다.
나는 욕망한다. 내 삶에 언제나 가슴 떨리는 사랑이 있기를! 비록 그것이 삶에 대한 질척이는 미련일지라도. 나는 일흔이 넘어서도 감미로운 키스를 하고 여든이 넘어서도 만족스러운 춤을 추고 싶다.
*박진영.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7인조 보이그룹 GOT7의 멤버이며 보컬과 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