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만큼씩만 받아들여보기
김옥경
얼마 전 온라인 설문조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연령대를 선택하는 문항에 고민 없이 40대에 체크하면서 새삼 내 나이를 떠올렸다. 마흔여덟. 이제 앞자리 숫자 4를 지킬 날보다 5로 가는 게 더 빠른 나이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연령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마흔이 넘은 내 나이가 믿기지 않아 30대에 체크를 해야 하나 꽤나 진심으로 고민 했었다. 아니, 내가 어디를 봐서 40대야? 결국은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40대에 표시를 했지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10대에는 20대를 많이 동경했고 진짜 20대가 되어서는 내 일은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에 따른 책임이 버겁기도 했다. 하지만 내 앞에 아직 많은 날이 있다는 희망은 나이 자체가 주는 안도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들을 내 뜻대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그때, 내 인생에 서른은 물론이거니와 마흔은 없는 나이였다.
특히 ‘40대에도 사람이 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물론 죽는다는 뜻은 아니고 그 나이에는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 싶었다. 내가 중학생 때 40대였던 부모님은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 가사처럼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로 대변되던 시절이라 취향 없고, 유행 없고, 희로애락의 감정은 사라진 나이인 줄 알았다. 그저 오늘을 살고, 일만 하며 고리타분하게 사는 게 그들의 몫인 줄 알았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나만 아니면 되었으니까. 나는 아직 젊고, 그리고 그 젊음은 영원할 줄 알았으니까.
30대가 되었을 때는 앞자리가 바뀐 것에 적잖이 놀랐지만, 결혼하고 원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자부심을 갖게 했다. 남편과 다툼도 많고 육아에 몸과 마음이 지쳐 가던 시절이었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결혼 생활, 내 손으로 가꾸어 본 나의 집, 출산, 엄마가 된 것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몸은 아직 마음먹은 대로 잘 움직였고 조금 아픈듯해도 금방 나았다. 그리고 그땐 적어도 흰머리는 없었으니까.
30대에서 40대가 되는 건, 20대에서 30대가 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는 무렵에 많이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특별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없던 증상들이 나타나니 ‘이러다 큰 병에 걸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었다.
눈가에는 툭하면 수포가 솟아올랐고, 하얗게 곪은 구내염은 낫기 무섭게 또 하나가 움푹 파였다. 10년 전에 다친 무릎은 내내 괜찮다가 갑자기 아파지기 시작했고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은 손까지 저려왔다.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 쉬는 빈도가 늘어나고 자고 일어나도 머리가 개운한 날이 별로 없었다. 불안이 커지는 날에는 이게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마흔 앓이’ 인가 싶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걱정을 조금씩 놓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40대라는 내 나이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에게 40대는 이렇게 신체의 통증으로 찾아와서 마음의 통증으로 번져갔다. 책임져야 하는 일과 챙겨야 할 사람들은 어깨 위로 촘촘히 쌓여가고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일도 많아졌다. 특히 마음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을 때는 당황을 넘어서 좌절감 마저 들었다. 새치는 완연한 흰머리로 바뀌어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지 않으면 백발이 되는 건 시간문제. 아픈 다리는 이대로 망가질 것 같고 저린 손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나 싶어 마음이 답답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책임만 늘어가고 나는 잃는 것이구나!'
한동안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그저 책임을 위해 일만 하는 사람, 취향도 잊고 참으며 짜장면이 먹고 싶어도 싫다고 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몸과 마음이 작아져 할 수 있는 게 줄어들고 이대로 힘없이 늙어간다고 생각하니 슬퍼지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나이 든다는 건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곧 늙는다는 것이니까. 난 늙는 게 싫었다. 선명하던 삶은 바래고 바래다 잿빛이 되어 서서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무심코 내려다 본 손에 손톱이 제법 자라 있었다. 나는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무겁게 느껴져 자주 자르는 편인데 그 즈음에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손톱을 자르는데 손등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손톱깎이를 들고 열 손가락 가지런히 길어진 손톱을 보는데 새삼 놀라웠다.
‘나에게도 아직 자라나는 게 있다니! 나 아직 살아 있구나!’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로 애물단지 같이 빨리 자라던 흰 머리카락도 다행스러워 보였다. 쑥쑥 자라렴. 어떤 날은 나에게 맡겨진 책임들이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멈추지 않고 자라던 손톱과 머리카락처럼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걸까.
손톱을 깎을 때마다 궁상맞게 감격스러웠고 새로 돋아난 흰 머리카락에 뿌리 염색도 정성스럽게 했다. 증상에 맞는 약과 건강식품을 챙기고 틈틈이 산책로를 걸었다. 제멋대로 자라나는 마음을 돌보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다. 안 좋은 증상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가 다시 도졌지만 그러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50대를 바라보는 지금 20대만큼의 젊음도 30대만큼의 자부심도 없지만 한동안 잿빛이었던 것들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옷장에서 옷을 고를 때 고민하던 70이 훌쩍 넘은 친정엄마의 입꼬리, 백발에도 매일 아침 뒷산으로 산책을 다녀오시는 아랫집 할머니의 발자국, 새 학기부터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는 선배의 눈동자. 50에 시작한 테니스를 10년째 치신다는 고모부 손의 굳은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언가는 자라기를 멈추기도 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설레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끈기도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일에 기꺼이 도전할 만큼 심장은 아직 잘 뛰고 있으니 그런 심장을 믿고 한 걸음 내디뎌보려 한다. 내 앞에 다가올 나이들이 조금씩 내 것으로 보이는 것 같다. 매일 하루치만큼 자라는 손톱을 보며 딱 그만큼, 손톱 만큼씩만 마음에 자라난 잿빛을 잘라내고, 조금씩 천천히 빛바래게 내 나이를 돌봐야지 마음먹어 본다.
* 1999년 데뷔한 대한민국 5인조 보이그룹 'god' 의 노래 '어머님께'의 가사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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