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임 : 만우(滿友)]
글쓰기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생계를 위해 일하며,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에 눈물을 지으며, 수술 후 통증을 이겨가며, 새생명이 움트는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면서도 왜 기어코 쓰려는 걸까.
만우는 삶의 고단함과 갈등을 견디며 정체성의 위기를 글쓰기로 풀어가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가 아닌 옥경, 세리, 동미, 은희라는 이름으로 시즌2, 24편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준 순간들을 잘 가꾸어 당신께 보냅니다. 만우의 글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당신이 품은 고유의 색과 향기가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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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음식, 여행, 일상철학, 교육 분야의 칼럼 네 편을 보냅니다. 음식에 더해지는 삶의 이야기, 엄선한 국내 여행지, 삶 속에 녹아든 철학, 그리고 건강한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에 관한 팁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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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맛, 단순한 삶
박세리
짬짬이 쉰 것 같은데 피로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 온통 ‘맵단짠(맵고 달고 짠)의 짬뽕탕’을 시전 중이다. 일, 일, 일, 강의, 학업, 시험, 육아, 살림. 모두 스스로 벌여놓고는 중압감에 헉헉댄다. 아, 떠나고 싶다. 나보다 더 바쁘고 힘든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나는 뻔뻔스럽게도 보상을 원했다. 일상을 견딜만한 오감의 기억이 필요했다.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탁 트인 공간, 풀냄새, 고요함, 그리고 남이 해준 맛있는 음식.
통장 잔고를 확인할 새도 없이 ‘지금 아니면 대체 언제?’라는 마음의 소리가 비명처럼 밖으로 쏟아져 나올 기세라 무작정 행동하기로 했다. 지난 5월, 걸림돌이었던 시간은 휴직계를 던져 만들고 돈은 다녀와서 갚기로 마음먹으며 아이 학교에 교외 체험학습 신청서를 보냈다. 그렇게 난생처음 아무런 계획도 없이 카드 한 장 챙겨 아이와 제주로 2주 살이를 떠났다.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 쓰고 노는 걸 즐기는 아이와 가만히 앉아 책 읽고 산책이 곧 운동인 내가 과연 무계획으로 2주를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지만, 기우와 달리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제주는 우리가 머무르는 내내 청명함과 시원한 바람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었고 무계획 여행은 나와 아이에게 느슨함과 여유를 선사했다. 숙소, 맛집 탐방, 바닷가 산책이라는 단순한 일과에 우리는 금세 적응했다. 호박잎수제비와의 만남도 그랬다. 평소처럼 맛집을 검색하던 중 아담한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기 가보자. 식당이 초가집이야.”
“정말?”
“여기서 수제비 판다는데? 호박잎수제비래.”
“수제비? 오! 가자. 가자.”
점심시간이 지나 도착한 수제빗집은 제주 돌담에 둘러싸인 소담스러운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다. 텅 빈 마당에 차가 들어서자, 사장님이 나와서 대뜸 초가집 뒤로 돌아가 보라 하신다. 우리도 마치 매번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네!” 답하고는 종종거리며 뒤로 돌아갔다. “세상에!” 초가집과 돌담이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던 메밀꽃밭이 눈앞에 펼쳐져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름다운 메밀꽃밭을 에피타이저로 내어주는 사장님의 센스에 그곳이 대번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제주 맛집이라며 유명세를 탄 식당의 음식은 모두 어슷비슷한 맛을 낼 뿐,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비싼 가격에 비해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이 없었으니 맛집 탐방에 매번 아쉬움이 남았다. 과연 이곳의 음식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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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메뉴는 딱 세 가지뿐이었다. 구수한 맛의 ‘제주 호박잎수제비’, 칼칼한 맛의 ‘제주 왕만두수제비’, 그리고 ‘제주 맷돌호박전’. 모두 호박을 활용한 음식이었고 혼자서 조리부터 서빙까지 하는 1인 음식점인 만큼 메뉴와 인테리어도 단출했다. 잠시 후 상에 오른 호박잎수제비는 맑은 국물에 색이 진해진 호박잎이 가득 담겨 나왔다. 처음 맛보는 음식에 장벽이 높은 아이는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먹더니 이내 한쪽 엄지손가락을 척! 올린다. 국물은 일단 합격이란 뜻이다. 까탈스러운 입맛을 달고 나온 그녀에게 ‘따봉’을 받은 음식은 어른 입맛에도 제법 그럴싸하고 재방문 정도는 흔쾌하게 할 수 있을 맛집이다. 아이 입맛에는 슴슴할 호박잎은 모두 건져낼 거라 예상했지만, 아이는 국물부터 시작해 수제비만큼 많던 호박잎까지 모두 해치웠다. 식사를 다 마친 아이는 “엄마! 진짜 맛있어! 다음에 또 와!”라며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쌍따봉을 날렸다.
내 입맛에도 구수하고 깔끔한 육수와 쫀득한 수제비, 적당하게 익혀 부들부들한 호박잎의 어울림이 상당했다. 간간이 수저에 올라앉는 잘 익은 감자와 노란 호박이 더해져 심심치 않았다. 보통 호박잎국에는 된장을 풀지만, 이곳은 맑게 끓여내 담백하면서도 맛깔스러웠다. 제주에서 먹었던 음식 중 가장 소담했지만, 가장 만족스러웠던 식사였다. 별스럽게 좋지 않은데 그대로 충분한 맛이랄까. 간결한 음식이 주는 만족감은 어쩌면 보이는 것 이면에 담긴 수고로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호박잎 손질은 번거롭다. 호박잎국이라도 하려면 호박잎의 잎맥부분, 얇은 겉껍질부터 벗겨내야 한다. 이후에도 빨래 빨듯 바락바락 씻어내야 부들부들한 식감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뒷면에 작은 진딧물이나 응애가 붙어있을 수 있어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익힐 때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다. 끓는 물에서 오랫동안 두면 너무 물러져 식감을 살리기 어렵다. 수제비 반죽도 제법 손이 간다. 질척하지 않게 물양을 조절하고 쫄깃함을 더해줄 식용유를 약간 넣어 충분히 치댄 후 냉장고에서 최소 30분 넘게 숙성시켜야 한다. 거기에 펄펄 끓는 장국에 얄팍하게 뜯은 밀제비를 손수 하나씩 넣어야 비로소 쫄긴한 수제비를 맛볼 수 있다. 간단해 보이는 음식이지만, 재료 손질부터 조리까지 여정이 만만치 않다. 그동안 ‘맵단짠’의 사나운 맛에 길들어 있던 혀에도 쉼을 허락한 한 끼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성스러운 음식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운 기운으로 오름에 올랐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는 새소리, 바람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외에 아이와 나의 숨소리만 들렸다. 좋은 음식을 먹고 녹음 속 나와 아이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충만하게 채워져 가는 나를 느꼈다.
“현대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다. 자연에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
법정 스님의 말씀을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지낸 단순한 삶과 호박잎수제비의 소박한 맛이 마음의 곳간에 차곡히 쌓였다. 일상을 버틸 오감의 기억들로 고요하고 아름답게.
*법정스님/류시화 엮음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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