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임 : 만우(滿友)]
글쓰기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생계를 위해 일하며,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에 눈물을 지으며, 수술 후 통증을 이겨가며, 새생명이 움트는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면서도 왜 기어코 쓰려는 걸까.
만우는 삶의 고단함과 갈등을 견디며 정체성의 위기를 글쓰기로 풀어가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가 아닌 옥경, 세리, 동미, 은희라는 이름으로 시즌2, 24편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준 순간들을 잘 가꾸어 당신께 보냅니다. 만우의 글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당신이 품은 고유의 색과 향기가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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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음식, 여행, 일상철학, 교육 분야의 칼럼 네 편을 보냅니다. 음식에 더해지는 삶의 이야기, 엄선한 국내 여행지, 삶 속에 녹아든 철학, 그리고 건강한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에 관한 팁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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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철학-
숏폼의 시대에 ‘적합한’ 소설 읽기
최은희
숏폼(short form)의 시대다. 평균 15-60초, 최대 10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동영상 콘텐츠가 빠른 시간 안에 재미와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대표적인 플랫폼으로 틱톡이 있으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처럼 기존의 이미지나 호흡이 긴 동영상 중심의 플랫폼들도 각각 릴스, 숏츠 등 자체 숏폼콘텐츠를 키워가고 있다. 드라마도 1.2배속으로 보는 시대가 됐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작품의 서사나 흐름을 이해하고 집중하기보다 빠른 시간 안에 결론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방송 클립, 하이라이트 등의 요약본을 본다. 이처럼 짧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밌거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세상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얼마나 시성비* 떨어지는 말인가.
특히 소설은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짧은 시간 안에 읽어낼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지루한 인물소개와 배경 묘사를 견뎌내야 한다. 다 읽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도파민 팡- 터지는 만족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느냐 묻는다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위로와 사랑, 소속감을 얻을 때도 있지만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낄 때도 있다. 이때 소설은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고 인간관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 준다.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불쌍한 사람, 부러울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 그리고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는 현실 속 인물과 닮은 소설 속 인물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하다 보면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다. 게다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란 점에서 내 말이 비판의 대상에게 전해지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소설이 일종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소설 읽기의 유용함은 단순히 감정해소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소설 속에는 현실세계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인물의 어린 시절과 세세한 심리묘사, 행동의 동기가 등장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 보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 너머 인간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난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가령,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에는 딸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나오는데 소설은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화자를 통해 매몰찬 엄마의 말속에 곡진한 사랑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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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또 청국장이야. 밥 안 먹고 다른 것 먹으면서 살 순 없나?”
“미친년.”
한마디로 잘라 말하는 할머니의 힐난에 이모는 어린애처럼 샐쭉해진다.
“엄마는 꼭 나만 갖고 그러더라.”
하더니 엉뚱하게도 막 숟가락을 들고 있는 나를 걸고넘어진다.
“어떤 땐 진희가 꼭 엄마 딸 같애. 나는 아니고.”
그런데 이모의 당치 않은 응석에 대해서 또 한번 “미친년!”이라고 욕을 하거나 “시끄럽다!”라고 그 허튼 말문을 막아버릴 줄 알았더니 할머니는 뜻밖에 그러지 않는다.
“자식은 주고 싶은 도둑놈이라는데 어디서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생겨나갖고…….”
라고 혼잣말을 할 뿐이다.
할머니는 가끔 이렇게 이모의 응석을 은근히 받아줄 때가 있다. 내가 아는 할머니라면 그렇게 비논리적이고 나이와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억지 애교를 받아들일 리 없다. 그러나 이모의 어머니이기에 할머니는 그것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다.
(중략)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새의 선물>, 은희경, p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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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또 청국장이야. 밥 안 먹고 다른 것 먹으면서 살 순 없나?”라고 말하는 다 큰 딸의 반찬 투정에, 엄마는 “미친년”이라 답한다. 겉으로 보기에 엄마는 딸에게 욕을 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관찰자인 ‘나’의 심리묘사와 해석이 덧붙여지니 미친년이란 말속에 숨어있는 엄마의 고운 정에 미운 정이 더해진 깊은 사랑이 보인다.
또 유난히 자신이 싫어하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자신을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유독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있다. 왜 이렇게 그 인물이 싫을까 생각하다 보면 내면의 상처를 만나고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욕구를 발견하게 된다.
<새의 선물>을 읽으며 내가 가장 한심하다고 느낀 인물은 앞서 예를 든 주인공의 이모였다. 스물 한 살인 이모는 열두 살 조카보다 철이 없다. 남편 없이 홀로 두 남매와 손녀를 건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하는 엄마에 대한 배려 없이 외모 치장과 연애에만 몰두한다. 이 책에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광진테라 아저씨와 내로남불의 대명사 장군엄마 등 모난 인물이 많은데 왜 유독 이모가 제일 기억에 남고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인 진희와 내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 진희처럼 일찍 철들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진희처럼 나 또한 아픈 동생에게 뺏긴 부모의 관심과 돌봄에 대한 욕구가 소설 속 이모란 인물을 ‘싫어한다’는 감정으로 표출되지 않았나 싶다.
이에 더해 심리학자 융(Jung, Carl Gustav)이 말하는 내면의 그림자, 무의식적 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타인을 향해 있던 이유 없는 질투와 미움의 감정이 진희와 이모의 관계 속에서 드러났고 진희가 괴로워할 때 함께 아파했으며 끝내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나에게도 평안이 찾아왔다.
미워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실망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자신에게 있는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고 소설을 읽으며 건강하게 해소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더 나아가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소설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고이 모셔두고 감상해야 하는 고가의 예술품이 아니라 얼굴로 문대고 입으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유용한 예술이다. 물론 소설이란 문학작품을 유용성의 측면에서만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소설 읽기가 짧은 시간 안에 최고의 효과를 얻으려는 현대의 트렌드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읽는 사람은 죽기 전에 천 번을 산다.’라는 말이 있다. 천 번을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지혜를 소설을 읽으며 단 몇 시간 만에 알게 된다는데, 시성비를 강조하며 숏폼을 보는 시대에 이보다 적합한 콘텐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에 지치고 자신을 아직도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깊어가는 가을, #소설읽기를 #인증 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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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키워드로 여기저기서 ‘시성비’가 꼽힌다. 시간 대비 성능. 일본에서는 ‘타이파(Time Performance의 줄임말)’로 불린다. 현재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할 때 최대한 적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해내려는 욕망, 가장 똑똑한 선택을 하려는 욕망, 도파민을 터뜨리고 싶은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시사IN, 신혜림,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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