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칼럼 -
집에는 무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김옥경
내 아이 훈육은 어떻게 하시나요? 훈육은 꼭 무섭게 해야 할까요? 혹시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따끔하게 혼내야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아이들 ‘잘못’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초, 중, 고 시절을 보내는 동안 저에게 어른들은 무서운 존재, 그저 아이들을 혼내기만 하고 아이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 사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커다란 바위 같은 이미지로 남았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와의 관계라든지, 선생님의 부당한 태도라든지, 진로에 대한 고민 등 혼자서 답을 구하기 어려운 일들을 부모님을 포함해 어떤 어른과도 상의할 수 없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 줄 어른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지 않은 어른이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저는 경험해 보지 못했고 그렇게 제가 보고 들은 대로 어른들을 단정 짓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90년대에 걸쳐 있던 저의 학창 시절은 그야말로 ‘군부독재 시절’ 다웠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는 학생들로 구성된 선도부가 등교 시간 교문에서부터 동급생의 복장을 감시했고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마다 ‘사랑의 매’를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들고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 위협적인 물건은 위협으로만 그치지 않고 성적과 품행이 방정치 못할 경우엔 신체에 고통을 주는 실질적인 폭력이 되었습니다. 감시와 체벌이 비일비재했던 그런 일상들이 폭력이라는 걸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당연한 처우라고 생각했었죠.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적이 떨어져 손바닥이나 발바닥을 맞는 시간은 공포심과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이런 처벌을 받아도 제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고, 오히려 심하게 체벌하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은 더 싫어졌으니 ‘사랑의 매’에 사랑 효과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집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훈육은 일단 큰소리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저의 의견을 말하려 하면 말대꾸로 치부되어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곤 했으니까요. 옷걸이나 파리채, 총채 등 집안 살림살이는 때때로 체벌 도구로 사용되었고 제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저는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다고는 한 번 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늘 어린 내 마음보다는 본인들의 힘든 마음만 이야기했기에 그런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할 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이는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거구나.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건 혼이 나는 일이구나. 그냥 참자. 일단 큰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지.’ 이런 생각들이 커져가는 한 편에 ‘내가 무엇을 잘 못한 걸까?’ 하는 의문도 마음속에 함께 남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쯤, 주위의 가까운 어르신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집에는 무서운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저는 바로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 있던 그 어른들이 내 아이에게도 필요한 것인지 정말 헷갈렸거든요. 그 어르신의 말씀엔 아이가 나쁜 버릇이 들까 봐 걱정하는 뜻이 담겨있겠지만 아이의 좋지 않은 버릇을 꼭 무섭게 가르쳐야 하는 건지 의아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아이가 어른들의 말에 자신의 의견이나 고집을 세우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일까요? 그럴 때마다 무서운 어른이 되어 아이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따끔하게 가르쳐야 할까요?
아이가 유아기나 초등학교 때까지는 무서운 부모의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무섭기 때문이죠. 이 시기의 아이들을 무섭게 대하면 자신의 의지로 태도를 고치기보다 대부분은 공포심에 잠시 마음을 누르고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자아가 커지는 사춘기가 되면 눌러 놓았던 마음들이 부모님은 물론, 아이들 본인도 예상치 못한 태도로 표출되어 서로를 당황하게 하지요.
부모를 무시하듯 대하거나 신경질을 냅니다. 때로는 답답하리만큼 입을 닫고 방에서 나오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날은 나가서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기도 하는 등 어른들이 염려할 만한 행동을 합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자신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고 다그치고, 아이는 입을 닫고, 부모는 대답을 강요하며 더 무섭게 호통치고, 아이는 더 깊숙이 숨어 버립니다.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기 일쑤죠. 더 이상 ‘무섭게’의 효과는 없어집니다. 사실, 그전부터 무서운 훈육의 효과는 없었지만 이제 드러나게 된 것이죠.
부모님께서는 집에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 같나요? 집에 들어가는 일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집에 가는 게 힘들어 회사나 밖에 더 머물다가 들어갈 수도 있겠네요. 때로는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져 ‘들어가지 말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마음을 누르고 집에 온다고 해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기 싫어질 테고요.
그렇다면 무조건 무섭지 않은 부모가 되면 될까요? 아닙니다!
부모는 '무섭다. 무섭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기보다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권위가 있으려면 무섭고 따끔하게 해야 할 거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권위가 있다’는 것과 ‘권위적’이라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권위’는 사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솔하여 이끄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저 사람 말은 믿을 만하다. 저 사람의 말을 따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말로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 같은 것이라 평소에 보이는 모든 말과 행동에 묻어 있죠.
‘권위적’이라는 말은 ‘-적’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그 상태로 됨, 그런 성격을 띰’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권위가 없는 사람이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상태가 되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 말이 다 맞다. 그러니 들어라.” 와 같이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훈육을 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아이들을 훈육하다 보면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재 느낀 감정을 여과 없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표현하고 아이와 관련된 상황을 객관적인 기준 없이 기분대로 처리한다면 아이들을 더 혼란스러울 뿐 부모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정하게 말해도 아이들은 다 듣습니다. 일관된 기준에 다정한 신뢰가 바탕이 되면 아이들은 부모와의 대화가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한 시간 속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여러 겹 쌓이면 단호하게 말해도 나를 비난하거나 혼내는 것으로 듣지 않고, 어떤 문제가 생겨도 결국 끝에는 부모님과 상의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 줄 어른이 나의 부모님이라면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말에 반박을 한다면 일단 차분히 듣고 다정하게 대답해 주세요. 아이들은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이 어른 보다 미숙하기에 부모가 쓰는 말투와 단어들을 모방하고 배워 자신의 말을 만들어 갑니다. 아이의 말투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먼저 나의 말투와 태도를 점검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태도보다는 현재 대화를 나누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주세요. 말의 내용보다 태도에 중점을 둔다면 대화의 논점은 흐려지고 태도 지적만 하다가 서로가 기분이 상한 채로 결론 없이 끝나게 됩니다.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부모님을 가장 많이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힘들지 않게 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건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마음일 겁니다. 무서운 사람을 피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아이들이 먼저 다가오지는 않더라도 다가가는 부모를 피하는 일은 없도록, 한 호흡 쉬며 호통은 삼키고 아이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바라봐 주세요. 집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집에 무서운 사람이 있으면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집을 무서운 공간으로 느끼지 않기를, 나의 부모님을 무서운 어른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