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King My Mam
박세리
# 그녀, 미녜
그녀의 이름은 ‘미녜’다. 조금 어색하게 읽히는 그녀의 이름에는 한 아버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서려 있다. 아들 둘을 낳은 끝에 딸을 얻은 아버지는 큰 눈에 당신을 꼭 닮은 아이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름을 ‘미녀’라고 지었다. 출생신고서에는 다른 한자를 올렸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녀를 미녀라고 불렀고 ‘미녀야, 미녀야.’ 하던 것이 당시 어른들의 편한 발음대로 ‘미녜’로 변했다. 그녀는 호적에 오른 이름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아마도 유복하고 사랑 가득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담긴 이름이어서가 아닐까.
미녜는 유복한 집안 셋째로 태어나 아버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두 오빠에겐 사주지 않는 자장면을 미녜에게만 몰래 사주시곤 했는데 친구들을 만날 때도 미녜만 데리고 갈 정도로 어여뻐 하셨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길에 처음 맛본 슴슴한 평양냉면도, 혼자만 먹을 수 있던 달큰 짭조름한 짜장면도 미녜에게만 주어진 남다른 사랑이었다. 뒤로 동생들이 태어났지만, 각별한 사랑은 미녜 차지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넉넉한 집안에 외아들로 태어나 공무원으로 평탄하게 살았던 아버지가 돌연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다. 유순하고 세상 물정 모르던 아버지는 급기야 굳게 믿었던 지인에게 사기까지 당했다. 모두가 휘청였다. 그때부터였다. 미녜의 삶이 구깃해진 건. 부모님은 먹고 살길을 찾아 서울로 상경했지만 자식 다섯을 제대로 건사할 능력은 되지 못했다. 위로 두세 살 터울의 두 오빠는 각자의 삶을 살기 바빴고, 돈을 벌만한 나이부터 생계는 미녜의 몫이었다. 고단한 삶이었다. 미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 배움은 오빠들 몫이고, 생계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그냥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
평생 후회하는 일을 딱 하나만 꼽아보라고 묻는 내게 그녀는 “그때 나도, 내가 번 돈 나 공부하는 데 썼으면 어땠을까 싶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후회되기도 좀 억울하기도 해.”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내 “그래도 동생 둘 가르쳤잖아. 막내가 나한테 잘하잖아. 그럼, 됐지.”라고 말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평생 누군가를 돌보느라 자신은 미처 돌보지 못했던 그녀, 미녜에게는 어쩌면 무례한 질문이었다.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삶에 ‘후회’란 단어는 삶을 부정하는 말과 동의어였으니까.
미녜가 가족을 부양하는 생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한 남자를 만나고 나서다. 그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언변이 좋았다. 때때로 재밌고 무엇보다 적극적이었다. 사회인이었던 미녜와 달리 대학생이었던 남자는 자주 미녜 회사 앞에서 그녀가 일 마치길 기다렸다. 둘은 정동교회에서 덕수궁 돌담길로, 덕수궁에서 광화문으로 거리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고 추억을 쌓았다. 서로를 모모와 지지에로라 부르며 달큰한 연애 끝에 가정을 꾸린다. 온몸으로 어려운 시절을 버티고 딸 둘과 아들 하나를 얻는다. 나는 미녜가 낳은 첫 아이다.
# 그녀, 엄마
엄마는 고목 껍질 같은 손으로 옆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아니, 왜 내 새끼만 이렇게 늙었다냐.” 흰머리와 얼굴 곳곳에 포진한 기미, 이제 제법 진해진 주름들을 보며 하신 말씀이리라. “엄마, 나 마흔 넘은 지가 언젠데, 세월 모르는 소릴 해.” 타박으로 답한다. 물끄러미 올려다본 엄마의 얼굴에는 나보다 더 깊고 진한 세월의 흔적이 남았다. 고단해도 자주 웃었던 사람. 나와 달리 동그랗고 서글서글한 눈매 끝에는 여전히 웃음이 매달려 있다.
한창 치열하게 일했던 시절의 엄마는 핸드백에 콤팩트 대신 문고판 책을 넣어 다닌 문학소녀였고, 시인 릴케를 사랑했다. 허세, 사치와는 너무나 멀어 자길 위해 돈을 써본 적도 없고, 먹는 것조차 욕심이 없는 사람. 기껏 남 좋은 일만 하고도 미안해하는 나의 왕 여사. 괜스레 눈물이 나와 큼큼거리다 다른 소릴 한다. “운동은 하고 있어?”, “응? 그럼, 자전거 열심히 타지. 농장에도 열심히 올라가잖아.”
엄마는 몇 년 전 큰 교통사고로 이송 헬기까지 탔다. 당시 사고 소식을 전하던 동생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 지금 운전해?”
“아니? 왜 무슨 일이야.”
“언니, 엄마가 사고가 났는데... 헬기로 이송 중이야.”
부모님 곁에 살고 있는 동생은 본인이 가고 있다며 서둘지 말라고 당부했다. 통화를 마치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며 엄마와 한 마지막 전화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엄마처럼 엄마를 잃을까 봐 겁이 났다.
뇌출혈로 황망하게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집으로 전화를 걸어 딸을 찾으셨지만, 부재중이던 엄마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전화를 끊으시며 평소와 달리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로부터 2,3일도 채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의 부고가 날아들었고, 엄마는 그렇게 당신의 엄마를 보내야 했다.
운전대 잡은 손이 뻣뻣해질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가 정말 할머니처럼 그렇게 가버리면 어쩌지?’ 내 심장은 이미 발끝에 떨어져 펄떡이고 온몸에 피는 바싹 말라 사라진 것만 같았다.
‘엄마, 가지 마. 아직 아니야. 안돼.’ 이 말만 되풀이했던 끔찍했던 그날.
다행히 엄마는 이겨내셨다. 아직도 후유증으로 어깨가 자유롭지 못하고 세월에 내어준 몸은 여기저기 삐걱거리지만, 여전히 일과 살림을 도맡으신다. 만만찮은 삶을 살아온 엄마한테 묻는다.
“엄마는 아빠가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아빠? 잘생겼잖아. 얘,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남자 보는 눈이 높다 야.
하하하.”
뾰족구두에 정장 치마를 입고 출근하던 엄마는 남편 따라 귀농해 지금은 농부가 되었다. 서류와 타자기 대신 호미와 곡괭이를 손에 들고 종종 일상이 담긴 사진과 짧은 글을 보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