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몽돌 이야기
이동미
“엄마, 나 임신했어”
가장 먼저 희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방금 산부인과에서 두 개의 착상란을 확인했다고, 내가 틀림없이 쌍둥이 엄마가 됐다고 말이다. 인공수정 실패 후 두 번째 시험관 시술에서 만난 생명들이었다. 사이좋게 양쪽 자궁벽에 하나씩 자리 잡은 아기 씨들은 마치 두 개의 작은 별 같았다. (실제로 착상란의 표면은 ‘쌀로별’ 과자처럼 오돌토돌하게 생겼다). 휴대폰 너머 연신 축하한다고 잘했다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도 나처럼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기쁨보다 눈물과 함께 밀려오는 안도감에 목이 멨는지도 모른다. 임신이라는 대장정 가운데 함께 역경을 헤쳐나온 주인공들이었기에.
#임신,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결혼하면 당연히 엄마가 될 줄 알았다. 남편도 건강하고 나도 아직 젊으니까 아이는 마음만 먹으면 생길 줄 알았다. 2년 동안 무념무상으로 살아온 신혼부부에게 어른들은 차츰 아이 소식을 기대하셨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아직이요’라고 답하던 나는 결국 ‘노력 중이에요’로 말을 바꾸게 됐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마음먹고 노력하면 할수록 한 줄 뿐인 임테기(임신테스트기) 앞에서 고개를 떨구는 일이 자꾸 반복됐다. 불임은 아니라고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난임이라고. 여자로 태어난 이래 이토록 진지하게 나의 몸과 생식기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를 쉽게 가지지 못하는 현실이 한여름 습기처럼 내 마음에 슬픔과 자책이 되어 들러붙었다. 결혼 후에도 줄곧 이어왔던 방송작가로서의 경력과 선택들마저 부질없게 느껴졌다. 결국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임신 준비에 돌입하기로 했다.
마지막 방송을 마친 날, 엄마가 천안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점심을 사주며 말했다.
“그동안 밤낮없이 일만 했으니까 이젠 좀 쉬어. 엄마가 되는 게 원래 힘든 거야.”
뜨거운 순대국밥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펄펄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설핏 엄마의 눈빛이 보였다. 지금 엄마도 엄마라서 힘들까? 사돈어른들은 괜찮다고, 전혀 부담 가질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가시방석인 딸 못지않게 편할 날이 없었을 엄마의 시간들. 남 부럽지 않게 애지중지하며 잘 키운 딸내미가 아기를 가져보겠다고 직장생활을 그만둔 날, 엄마의 뚝배기에는 순대국밥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딸 그리고 딸 가진 죄인
“아이 진짜!! 이걸 어떻게 먹어?”
온전한 형태로도 달갑지 않은 생물체였다. 그런데 그 진액을 달여 눈앞에 대령하니 비명부터 무조건반사로 튀어 나왔다. 일에 미쳐 살던 워커홀릭이 친정에 내려와 뒹굴뒹굴 임신을 준비한 지 한 달쯤 됐을까. 임신 최대의 적은 스트레스라고 힘주어 말하던 엄마가 되려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참이다. 몸에 좋다는 음식에서부터 건강 보조기구까지 공수해 오는 엄마의 열성, 아니 집념은 그야말로 감동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감동도 나의 수용범위를 넘어서니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그래도 두 눈 질끈 감고 엄마의 바람대로 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R씨 집안의 장손과 결혼해 맏며느리가 된 외동딸이 혹여 애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흠 잡힐까 봐 매일 애가 타고 있는 엄마 때문이었다.
아닌 척해도 걱정과 불안이 많은 엄마다. 이 모든 걸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화하는 권사님이지만 마음은 늘 미혹되는 법. 특히 도련님의 결혼과 함께 동서가 생기자 엄마의 불안은 정점을 찍었고 ‘족보가 꼬이면 머리 아프다’, ‘시댁에서 네가 더 잘 해야 한다’며 딸의 임신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조선왕조 500년도 아니고, 21세기를 사는 딸에게 던지는 그 멘트에는 ‘딸 가진 죄인’의 걱정과 염려가 한가득 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엄마는 어땠을까? 그 성정에 한 카리스마 하는 시어머니가 됐을 텐데, 내가 딸로 태어나 엄마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마을의 어른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아이를 갖기 위해서는 나와 엄마의 인생 다반사가 필요한가 보다. 임신에 진심인 나와 그 뒷바라지에 지극정성이었던 엄마, 감사하게도 신은 이 두 사람을 모르는 척 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쌍둥이 엄마가 되었고, 엄마는 두 아이의 외할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