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난스러운 식물 사랑
최은희
나는 모태 식집사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내 곁에는 늘 식물들이 있다. 아들이 8살 때 학교에서 ‘집’을 그려왔는데 그때도 나를 식물 가꾸는 모습으로 그려왔다. 아이의 기억 속에 엄마는 흙을 고르고 물을 주고 잎을 닦는 모습으로 남아있나 보다. 게임하느라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 기억 속의 엄마도 늘 초록과 함께였다. 바쁠 때든 한가할 때든 항상 한 뼘 남짓한 세상 속 생명을 열정적으로 가꾸었다. 한 번은 반지하에 산 적이 있었는데 식물들이 자꾸 죽자 엄마는 집안의 모든 화분을 옥상으로 옮겼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풀 죽어 있던 식물들이 고개를 들자 축축한 내 마음에도 빛이 들어와 바싹 마른 햇볕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매일 무거운 물 양동이를 들고 엘리베이터 없이 오 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고생한 엄마는 옥상에 큰 다라이를 두고 빗물을 모았다. 어느 날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철물점에서 긴 호스를 사서 지하에서 옥상으로 물을 올렸다. 양수기도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엄마가 하나님만큼 대단해 보이고 사막에서 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콸콸콸- 아무 때나 물을 쓸 수 있게 되자 옥상에 더 자주 올라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우리만의 옥상정원에는 군자란, 엔젤트럼펫, 유도화 같은 화초들과 상추, 방울토마토 같은 작물들이 있었다. 엄마가 바쁘게 정원을 가꾸는 동안 나는 꽃구경, 물놀이, 흙놀이를 하고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 맛을 보기도 했다. 한낮의 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열심히 정원 관리를 하는 엄마의 등 뒤로 펼쳐졌던 그림 같은 노을은 내가 행복을 말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다.
비가 오면 녹아버릴까 종종거리고 바람이 불면 쓰러질까 동동거리는 엄마의 사랑 덕분에 나는 가장 낮은 곳에 살면서도 가장 높은 곳에서 한계 없이 뻗어나간 하늘을 꿈꿀 수 있었다.
이사는 또 어찌나 자주 다녔는지. 지금처럼 흔한 포장이사가 없던 시절, 거처를 옮기는 와중에도 50개에 달하는 화분을 쉽사리 버린 적이 없다. 엄마는 플라스틱 화분에서 볼품없이 자란 풀 한 포기도 책임감을 가지고 돌봤다. 심지어 본인이 암으로 입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봄에 목련이 피는 걸 보고 입원했는데 겨울이 가까워오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자 엄마는 조급한 마음에 나에게 부탁을 했다.
“은희야, 집안에 화분 들여놔야겠다. 서리가 내리면 다 죽을 텐데….”
“엄마, 지금 엄마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때인데 그깟 화분이 뭐가 중요해. 좀 얼어 죽으면 어때.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엄마 건강만 신경 써!”
당신보다 식물을 더 생각하는 엄마에게 화가 난 것도 있지만 혼자 50개나 되는 화분을 들여놓을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화분이 50개든 100개든 들여놔 달라면 들여다 놓을 걸 아픈 사람에게 괜히 모진 말을 했나 싶다. 사랑이라는 게 뭐 거창할 게 있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상대가 중요하다면 쓰레기라도 귀하게 여겨주면 되는 것을.
‘그깟 화분’을 외쳤던 나는 몬스테라, 알로카시아, 동백을 키우는 식집사가 됐다. 막상 식물을 키워보니 엄마의 유난스러운 식물 사랑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3년 간 키웠던 장미허브가 깍지벌레 때문에 어이없이 생을 마감했을 때 몇 날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남들이 보면 무슨 유난이냐 싶겠지만 내가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준 '나만의 장미허브'이기 때문에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거다. 마치 어린 왕자의 하나밖에 없는 장미처럼.
남들에게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만의 시간, 길들이고 길들여짐, 성실과 인내가 기쁨을 주고 때로는 눈물 흘릴 일을 만들어 준다는 걸 직접 식물을 키우며 깨달았다. 그래서 엄마는 옥상에 무거운 물양동이를 들고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자신이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애썼던 거겠지. 그리고 그 열심과 유난으로 나를 키웠을 테다.
저녁식사 준비할 때가 다가와 분주하게 분갈이를 하고 있는데 흙놀이 하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노을을 맞이한 아이의 얼굴이 태양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노을을 등지고 정원관리를 하던 엄마를 보며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엄마도 내 얼굴에 비친 태양을 보며 희망을 꿈꾸었을까. 초록과 함께였던 엄마와의 추억이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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