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내게 말을 걸 때
이동미
불안은 형태도 색깔도 없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일상 속 어딘가에 드리워져 있다가 바이러스처럼 내면의 면역체계가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침투한다. 그리고 평소 잘 보이지 않게 봉인되어 있던 나의 모습까지 들춰낸다. 불안은 집요하다. 교감신경계를 각성시키고 온몸을 극도의 긴장 상태에 몰아넣으며, 나를 끝끝내 이성의 영역 밖으로 튕겨내니까. 이때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사건 사고가 현실과 뒤죽박죽 되어버린다. 나는 인생의 온갖 걱정과 근심, 불행과 슬픔, 저주 속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 괴로워도 외롭지 않았던 이유
어릴 땐 생각할 틈이 없었다. 불안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정신없이 목표를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불안이 덮쳐오면 최상위 포식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초식동물처럼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만 쳤다. 그때 나를 구원해 준 존재는 다름 아닌 지인들이었다. 가족에게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넝마의 마음들을 그들은 기꺼이 만나 기워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봄바람처럼 떠오르는 이름들. 그들이 베풀어준 배려와 공감 덕분에 나는 불안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전화위복이랄까. 불안 덕분에 진짜 내 편이 누구인지,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초토화된 마음을 다독이며 생각했다. 불안은 괴로울 수 있어도 외롭지 않은 내 삶의 이면이라고.
# 중년의 불안을 달래준 에세이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철이 들기 시작했다. 불안할 때마다 지인들에게 기대기보다는 다른 존재를 붙잡고 더 단단하게 서려고 애썼다. 새롭게 찾은 존재는 책이었는데, 중년이 된 요즘에는 에세이를 주로 펼쳐본다. 고백하자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에세이라면 제값 주고 사서 보기 아깝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넓고, 알아야 할 지식은 넘쳐나며,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트렌드를 따라 가기에 급급한데 아무개 삶의 단상 따위가 뭐 큰 대수일까 싶어서.
하지만 마흔의 링 위에서 인생에게 제대로 어퍼컷을 얻어맞으며 나의 오만과 편독은 산산조각 났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녀 문제로 심란할 때, 주식시장보다 빠르게 자신감이 급락할 때, 그보다 더 무서운 속도로 건강이 나빠질 때, 인생 앞에 흰 수건을 내던지고 싶은 순간 나의 정신을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에세이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세이 '제목'들이었다.
<그럴 수 있어 (양희은)>, <애써 둥글게 살 필요는 없어 (쓰담)>, <남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에게 좋은 사람 (조원희)>, <그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오평선)>,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하완)>...
책의 내용이 훤히 예상되는 책들인데, 그 제목을 볼 때 눈물이 핑 고여 버리다니. 나이를 먹어서 눈물이 많아진 건지, 아니면 어금니를 꽉 물고 버텨왔던 눈물이 터진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나를 울린 에세이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다정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날 지인들이 내게 해주었던 위로처럼. '제목 한번 참 잘 지었네'라며 감탄하는 순간, 손에는 어김없이 그 주옥같은 제목의 책이 들려 있었고 나는 어느 새 제목만 보고 책을 사는 에세이 수집가가 되어 버렸다.
# 절묘한 타이밍에 필요한 한 마디
달숲 작가의 에세이 <열심히 사는데 왜 행복하지 않지?>(더 정확히는 제목)도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든 책이다. 탄탄대로 같았던 인생이 막다른 골목처럼 다가올 때, 내 마음을 에세이 제목이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펼쳐 든 책에는 프리랜서 작가로 살면서 겪는 지독한 불안과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타인의 기록에 동질감을 느끼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물 훔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혼자가 아니야'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라는 말보다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짠 내 나서 측은한 나의 유리멘탈> 중에서-
그동안 에세이 제목에 마음이 끌린 진짜 이유는 그 말들이 그저 따스하고 부드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달숲 작가의 글에서 나는 에세이 제목에 자꾸 눈길이 머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처럼 끝없이 침전하는 가운데 불안과 우울을 삼키며 애써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거치고 난 후라도 세상을 씩씩하게 살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확언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언어는 완전하지 않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또한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써나가고 싶다. 느릿한 걸음으로 바라본 세상을 다정한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싶다. 나의 글이 고된 하루를 보낸 그대에게 닿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삶의 무게를 안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가 더해질 때마다 불안도 비례해서 마음을 짓누른다. 그때 나는 에세이를 만났고 글을 읽어가며 잃어버린 기력을 회복했다. 고작 짧은 문장에 불과하지만 절묘하게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었던 에세이 제목 덕분에 깨달았다. 삶에는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나아가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도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줄곧 불안으로부터 도망쳐 왔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불안으로부터 멀어지기보다 그 속에서도 평온을 지켜내 보자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실패하더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 과정 속에서 한줄 한줄 꾸준히 읊어나간 나의 문장이 누군가의 삶에 가닿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게 됐으니까.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희열의 순간을 고대하며 글쓰기를 이어 나가자고 마음 먹는다. 책장에 꽂혀 있는 에세이들이 제목만큼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