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안에게 ‘왜’라는 질문을 허락한다
최은희
며칠 전부터 자꾸 눈 밑이 부르르 떨린다. 남편은 마그네슘 부족이라며 영양제를 챙겨먹으란다. ‘무슨 걱정있어?’ 물어봐 주면 좋으련만, 야속하기만 하다. 어쨌든 정말 마그네슘 부족일지 모르니 인터넷으로 영양제를 검색해봤다. 저렴하면서도 좋은 제품을 사려고 한참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데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왜 눈 밑이 떨리는 걸까? 큰 병은 아니겠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신경 쓰이나? 피곤한가? 아니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지다 다행히 한 곳에 멈추어 섰다. 최근 결혼 10년 만에 집을 샀는데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건 아닌지, 현재 살고 있는 집이 빠지지 않아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이사 가기 전까지는 계속 떨리는 눈을 부여잡고 잠을 설치며 종종 걸음으로 안달복달하겠지.
나의 불안은 이렇듯 몸으로 온다. ‘불안하다’ 인식하기도 전에 눈 밑 떨림으로 오고 마른기침과 속쓰림으로 온다. 몸에서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당혹스럽다. 어디에서 불안이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자꾸 ‘왜? 왜? 왜?’하다 보면 불안은 더 극대화 된다. 부르르 떨리던 눈 밑은 부들부들하게 바뀌고 덜컹하는 심장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뛰다 보면 숨이 가빠진다. 식은땀이 흐르고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눈앞이 깜깜해지면 이러다 곧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열심히 사는데 왜 행복하지 않지>의 달숲 작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바람에 비유했다.
오늘 당신에게 도착한 불안은 당신 탓이 아니다.
통제되지 않는 불안은 당신 때문이 아니다.
그저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바람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왜 나에게 불어오는 걸까
많은 것이 궁금하겠지만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다.
통제되지 않는 불안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왜 나에게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퍼부으며 불안의 이유를 찾으려 든다. 너무 괜찮아지고 싶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엔 끝끝내 질문을 붙잡고 늘어지다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는데 살면서 딱 한 번 나의 오랜 불안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이십대 초반 즈음의 일이다. 밤새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책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눈물이 났다. 주인공이 불쌍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광활한 자연에 대한 묘사와 자연을 대하는 인디언들의 태도에 감동했구나 싶었는데 여전히 눈물이 나왔다. 어떤 의미를 부여해 보아도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또 '왜' 라는 질문을 반복하다 보니 유독 한 장면에서 가슴이 뻐근할 정도의 아픔이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주인공은 체로키 인디언인 외조부모의 산 속 오두막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주인공이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배우고 넘치는 사랑 속에서 치유되고 성장해 가는 걸 보면서 책 제목 그대로 내 영혼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주인공 주변인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백인 이웃들은 아이가 학교도 가지 않은 채 인디언의 교육을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동학대라는 이유로 아이를 강제로 고아원에 맡긴다.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나서야 도착한 고아원에서 아이는 까만 밤하늘을 보며 가족들을 그리워한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에 이입돼 시작된 내 눈물은 베갯잇을 다 적시고도 쏟아져 나왔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깬 엄마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많이 속상해하셨다.
“어릴 때 동생이 심장병에 걸려 죽을 뻔 했던 거 알지? 그때 걔를 살리느라 너를 시골 할머니 댁에 맡길 수밖에 없었어. 너도 어렸을 텐데. 너한텐 신경을 못 썼구나. 네가 책을 읽다가 그때 생각이 났나 보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꿈 이야기를 했다.
2층 양옥집이었던 할머니댁은 전면에 보이는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현관문이 나왔다. 혼자 현관문을 열고 나와 테라스를 걷는 ‘작은 나’는 무척 심심해 보였다. 햇살은 따스하고 주위는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혼자 놀다 지쳐 2층 난간에 걸터앉았는데 그만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쿵- 떨어지던 꿈. 아주 어릴 때부터 반복해서 꾸었던 꿈이었다. 꿈 이야기를 마치자 가슴에 있던 딱딱하고 뜨거운 곳에서 말이 나왔다.
“엄마, 그때 나는 너무 무서웠어. 엄마랑 헤어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
진작 했어야 했던 말. 동생 때문에 지친 엄마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어려서 모를 줄 알았다고. 아픈 동생을 챙기느라 미처 나는 생각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어렴풋한 기억속에서 명확한 형태도 없고 언어로 표현 되지도 않는, 오직 몸으로만 느껴지던 일의 원인을 찾게 되다니…. 그때 이후로 나는 오랜시간 반복됐던 꿈을 꾸지 않게 됐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운명처럼 다가왔던 순간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안다. 늘 마음에 품었던 ‘왜?’라는 질문이 내게 있었기 때문에 답이 나에게 왔겠지. 몸이 반응하고 나서야 감정을 알아차리는 둔한 나지만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차츰차츰 기분의 원인을 찾아가며 나는 나를 보듬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왜’는 안전하다. ‘왜’ 라는 질문이 나를 공황으로 이끌고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심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정표현에 서툰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들을 수 없는 대답이라 해도, 평생 마주칠 수 없는 장면일지라도 나는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불안에게 ‘왜’라는 질문을 허락한다.
*이번 주제는 달숲 작가의 에세이 <열심히 사는데 왜 행복하지 않지>를 함께 읽고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