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지옥’이라고 해서 결혼했더니
‘결혼도 지옥’이라면
최은희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다. 과거에는 <사랑의 스튜디오>같이 스튜디오에서 맞선을 보는 형식이나 연예인 출연자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나 현재는 일반인 출연자들의 '썸'과 '연애'를 관찰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2018년 히트했던 <하트 시그널>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솔로지옥>, <나는 솔로>, <돌싱글즈>, <환승연애> 등이 주춤했던 연애 예능의 전성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일반인 출연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웃통을 벗고 춤을 추는 등 자신을 어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수많은 드라마,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끝은 결혼으로 귀결된다. 실제로 <돌싱글즈>에 나온 윤남기, 이다은 커플은 결혼에 골인해 결혼생활 하는 모습을 유튜브로 보여주며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혼 프로그램 또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이혼한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제 혼자다>, 문제가 있는 부부들을 위한 관찰과 솔루션이 주가 되는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이혼숙려캠프> 같은 프로그램들이 이에 속한다. 이혼을 앞둔 부부들의 생활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고성과 막말을 일삼으며 다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맞나 싶다.
상반된 두 프로그램의 유행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솔로 지옥’이라고 해서 결혼했더니 ‘결혼도 지옥’이라니,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낭만적 사랑과 결혼제도
<나는 솔로>는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솔로 남녀들이 한 공간에 모여 약 6일간 함께 생활하며 사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프로그램이다. 10여 명의 남녀 출연자들은 원하는 상대와 데이트하기 위해 제작진의 미션을 완수하고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벤트를 하거나 경쟁자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참가자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등 마치 실제 연애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프로그램을 한참 시청하다 보면 ‘낭만적 사랑’을 이루고 있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상대방을 얻기 쉽지 않을 것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그토록 애절했던 이유와 트와이스가 ‘CHEER UP BABY 좀 더 힘을 내.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그래야 네가 날 더 좋아하게 될걸’이라고 노래했던 까닭, 그리고 ‘운명’이라 믿었던 필자의 수많은 연애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이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롯되었다니.
희극인 줄 알았던 낭만적 사랑은 결혼이라는 사회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비극이 된다. 낭만적 사랑의 핵심 요소인 ‘자유와 쉽게 얻지 못함’이란 두 요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간통죄가 사라지긴 했지만 결혼 후 다른 상대를 사랑하는 일은 금기시되고 있으며 상대방과 데이트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경쟁자와의 신경전이 필요하지 않다. 새로운 집에서 둘만의 소꿉놀이하는 즐거움과 운명이라 믿었던 결혼에서의 낭만은 3년이 되면 대체로 막을 내린다.
연애 때라면 헤어지는 것으로 감정을 마무리 하면 되겠지만 결혼을 종결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정리해야 할 문제가 감정 뿐 아니라 법적,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아이를 양육하는 일까지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혼하는 일도, 낭만적 사랑이 끝났음에도 결혼을 지속하는 일도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낭만적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는 환상’ 이외에도 결혼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레퍼런스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낭만적 사랑이 결혼에 이르게 되는 과정, 즉 ‘썸’과 ‘연애’의 과정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로 간접 체험하며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데 반해 실제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참고하는 게 전부다. 좋은 부모를 만나 부부간의 소통방식,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등 원만한 부부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체득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교육과 레퍼런스 없이 삶의 반 이상을 살아가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 부모님의 사이를 좋게 만들 수도 없고 당장 이혼하기도 쉽지 않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결혼과 사랑은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사랑은 기술
낭만적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는 신화는 프랑스혁명 무렵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다.1) 우리나라는 서양 문물이 들어온 1920년대 신여성을 중심으로 연애혼이 유행된 이후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1970년대 즈음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2)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결혼 방식이 불과 10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혼에 있어 낭만적 사랑이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부모님이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을 하란 뜻은 더욱 아니다. 다만, 상대방을 보고 가슴 뛰고 설레는 시기가 지났다고 해서 사랑이 끝났다 여길 게 아니라 결혼 생활에 있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시기가 됐다고 받아들여 보면 좋겠다. 마치 기어 다니던 아이가 걸음마를 해야 될 때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낭만적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여기기에 사랑의 의미는 훨씬 깊고 넓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피아노 연주를 하기 위해 악보를 익히고 거듭된 연습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 또한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노력할 준비가 됐다면, ‘어떻게’에 대한 문제는 오히려 쉽다. 관련된 책만 해도 수백 권이 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한다면 부부상담을 받아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떠한 경로로든 정보를 얻고 ‘이걸 배우자가 좀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볼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데 있다.
결혼지옥 속에 사는 부부들은 대부분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상대방의 마음이 변해서, 배려를 하지 않아서, 생활 습관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관찰 예능을 통해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해진 마음은 한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고, 배우자의 튀어나온 뱃살만큼 내 눈가에도 주름이 늘어난 것처럼 상대방도 나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대체로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발을 못 맞추는 건 나머지 사람들이라고... 그렇지만 성숙은 자신의 광기를 감지하고, 적절한 때에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에 대해 당황스러워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3)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인정하는 것’ 바로 여기에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부부, 가족이란 이름으로 엮여있지만 결국 '내 삶'이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 밖에 없다. 배우자나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행복을 위해 ‘사랑하기’를 선택하라.
‘건강하자’는 말은 소망을 표현하는 말로 쓸 수 있지만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말이다. 아무리 건강하자 말해도 갑자기 병이 생기거나 사고가 나는 걸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하자’라는 말은 의지만 있다면 외부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눈이 오고 비가 오더라도 ‘할 수 있다’.
‘행복하자’라는 말 또한 그렇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지만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기에는 요원하다. 하지만 ‘사랑하자’는 가능하다. 사랑은 배우고 익히고 실천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배우자 사랑하기’를 신년 계획에 넣기를. 상대를 얻기 위해 쏟았던 노력의 1/10만이라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면 결혼 천국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1) <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p71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