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만날 결심을 했다. 긴 시간 서로를 탐색하며 무해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만나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엄마들은 대낮에 만나 '육아와 교육, 남편과 시댁, 돈과 부동산 이야기' 외에 무슨 이야기를 할까?
오늘도 우리는 엄마, 아내, 딸,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바꿔달며 스러지는 나를 일으켜 옥경, 세리, 동미, 은희로 살기 위한 새 숨 같은 수다를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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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에는 교육, 인문, 여행, 일상철학 분야의 칼럼 네 편을 보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문턱에서 조금씩 차오르는 달처럼 만우의 글도 차곡차곡 채워보려 합니다. 매주 월요일, 만우와 함께 여러분의 사유도 깊어가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칼럼-
과거와 오늘을 잇는 길
-남한산성 옛길을 걷다-
이동미
입추가 지나면 신기할 만큼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시원해진다. 여름내 은신해 있던 에어컨 밑 지상낙원에 이별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 창밖으로 서서히 달라지는 풍경을 보니 더위에 늘어져 있던 역마살이 꿈틀댄다. 따갑다 못해 아프게 느껴지는 햇살이 두렵지만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살랑댄다. 동네 마실을 나가듯 가볍게 걸으며 가을을 맞이하고픈 당신이라면 여기, 남한산성 도립공원 옛길 코스를 추천한다.
국난의 현장에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남한산성은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 그리고 하남시에 걸쳐 약 11km에 이르는 성벽이다.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에 의하면 이곳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굴욕을 맛본 국난의 현장이다. 하지만 21세기 남한산성은 독일의 쾰른 대성당, 체코의 프라하 성, 로마의 콜로세움 등 이름만 들어도 여행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세계문화유산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있다.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래 우리나라를 빛내주는 문화재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까지 요구되는 까다로운 고증과 입증 절차는 견고하게 쌓아진 성벽과 성문, 여기에 자연과 어우러진 남한산성의 가치와 존재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한다. 과거가 아닌 바로 오늘, 푸른 나무와 성벽 사이로 자신의 곁을 내주는 남한산성의 품으로 천천히 파고들어 보자.
사진1) 남한산성 옛길 안내지도
남한산성의 한해 방문객은 약 300만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산성의 터가 워낙 넓고 여러 형태의 샛길들과 주요 코스들이 손금처럼 연결되어 있어 여유 있게 거닐 수 있다. 특히 수도권 최고의 소나무 군락지가 주는 멋과 풍채는 그야말로 엄지척! 9월의 여행지로 이곳을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있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장식하고 있을 법한 멋스러운 소나무들을 눈으로 보는 호사 뿐 아니라,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상쾌함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여름내 에어컨과 선풍기같은 인공바람에 익숙해진 폐에 싱그러운 자연의 숨결이 들어가니 몸과 마음이 푸릇해지는 기분이다. 일본이 원산지인 편백나무보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호흡기 건강에 더 이롭다고 한다. 여행은 아는 만큼 누릴 수 있는 법! 유독 소나무가 우거진 길에서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 느려지고, 숨이 더 깊게 쉬어진다.
선조들의 삶을 생각하며 이 길을 걷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 후기 10개의 대로(大路) 중 하나였던 ‘봉화로’의 일부 노선을 활용해 만들었다. 한양에서 출발해 경기 이천과 충북 단양을 지나 경북 봉화에 이르는 봉화로는 그 길이만 해도 자그마치 약 500리(약 196.4km)였다고 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이어진 큰길이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다.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상경했을 지방 선비들과 대박을 기원하며 장터로 이동했을 보부상들, 여기에 왕릉으로 제사를 지내러 떠나는 왕족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를 안고 이 길 위에 발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구비구비 이어진 이 옛길 위에서 선조들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가을로 더 가까이 다가선 풀과 나무, 하늘과 바람 사이를 거닐며 마주오는 사람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며 생각해 본다. 인생의 행복은 물질적 소유와 사회적 성공보다 지금처럼 천천히 길을 거닐면서 누리는 소소한 만족과 넉넉한 여유로 더 가득채워지는 것이라고.
📍옛길 코스 안내
🌐동문길(약 5 km): 남한산성 동문▶산성 로터리▶북문▶서문▶남문 순환
🌐서문길(약 2.1 km): 송파구 거여동▶남한산성 서문
🌐남문길(약 6.5km): 성남‧하남‧위례동 주민센터▶위례 성복교회▶남한산성 남문
🌐북문길 (약 5.8 km): 광주향교▶남한산성 북문
사진 2) 좌측-남한산성 동문길, 우측-남한산성 서문길
남한산성은 다섯 종류의 둘레길 코스로 구성돼 쾌적한 산책과 함께 트레킹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트래킹 초보자이거나 아이들과 함께 남한산성 옛길을 찾는다면 두 번째 코스인 서문길을 추천한다. 감이동 초입은 먹자골목이 있어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힘차게 트래킹 길에 오를 수 있는 베이스캠프다. 무엇보다 서문으로 오르는 길 곁으로 남한산성의 다양한 생태계가 펼쳐져 아이들과 동행하기에 좋다.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곳곳에 숨어있다. 그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동문길을 걸어보길 바란다. 이 구간에는 옛날 고관들이 풍류를 즐겼던 지수당과 군사훈련 시설이었던 연무관, 군사용 누각으로 사용됐던 수어장대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3) 남한산성 옛길 어플리케이션 화면
남한산성 옛길을 보다 계획적으로 탐험하듯 즐기고 싶다면 <남한산성 옛길 스탬프 투어>을 이용해 보길 바란다. 지난 2021년 9월에 출시된 이 어플리케이션은 각 스탬프 함에 설치된 무선 통신 기기(NFC)에 스마트폰을 올리면 인증 도장을 찍어주는 시스템이다. 남한산성 옛길에는 총 11곳의 스탬프 지점이 있으며 모두 구간에서 도장을 받을 경우, 남한산성유산센터에서 완주증서와 배지를 우편으로 발송해 준다.
지독하게 더웠던 2023년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파란 하늘 아래 번져오는 이번 가을은 남한산성의 옛길을 걷기에 그 어느 때보다 적기다. 고즈넉한 옛길의 정취와 소나무 군락의 푸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